쉽지 않네
부모님께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교회와 집만 오가던 딸이, 남자친구도 없던 딸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면 부모님은 뭐라고 하실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더구나 한국 사람도 아닌 중국 사람과 결혼을 한다니, 이 얘기를 꺼냈다가는 머리카락 다 밀리고 외출 금지당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나는 교회에서 음악 간사로 일하고 있었고, 엄마는 부목사님으로 교회 사역을 함께 하고 있었다. 덕분에 비교적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매주 수요일 오전, 교회 교역자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날도 기도를 마친 후 엄마의 표정을 살폈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기회는 지금이다!’ 싶어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꺼냈다.
“엄마, 있잖아…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며칠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어?!!! 누구? 어떤 사람이야?”
“음… 몇 가지 문제가 있어.”
“응? 무슨 문제?”
어쩔 줄 몰라하는 내 표정을 보며 엄마의 얼굴도 점점 심각해졌다. ‘우선 약한 것부터 던지자.’
“응, 그게… 신학생이야.”
“어. 그리고 또?”
“… 외국 사람이야.”
“외국? 어느 나라?”
“… 중국.”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 기도하자.”
엄마는 그 말만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가셨다.
사실 우리 가정은 그리 화목한 편은 아니었다.
삼대독자로 태어난 아빠는 친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을 갚느라 밤새 택시를 몰아야 했고, 복잡한 돈 문제와 성격 차이로 인해 부모님의 관계는 늘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엄마는 사역자로서 신앙을 최우선으로 여기셨지만, 적어도 딸만큼은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바라셨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그건 엄마의 바람일 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결혼이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그리고 어쩌면 평생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아빠 차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조르며 함께 걸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한 것과 똑같이 이야기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던 다정한 아빠는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쓱 웃으며 말씀하셨다.
“며칠 전에 네가 키 큰 남자랑 동네에서 걸어가는 걸 우연히 봤어. 인상이 참 좋아 보이더라.”
그러고는 덧붙이셨다.
“그래도 안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천천히 알아가자.”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일주일이 지난 후, 부모님은 남자를 직접 만나보기로 결정하셨다. 사실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말 그대로 프리패스상이었다.
키 187cm에 호리호리한 체형, 뽀얀 피부에 인상까지 좋아 보이는 외모 덕분에, 부모님께서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밝은 성격과 뛰어난 붙임성까지 갖추고 있어 더욱 기대가 됐다. 입만 열지 않는다면 절대로 중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말끔한 한국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남자와 나는 부모님과 함께 가벼운 식사를 마쳤고, 분위기 역시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후, 아빠는 남자가 마음에 든다며 결혼을 찬성하셨지만, 엄마는 교제는 허락하되 결혼은 3년 뒤에 하라고 하셨다. 문제는 남자가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음 날 새벽, 남자는 엄마가 다니는 교회의 새벽기도에 참석했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 후,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처음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한국인 15명을 말발로 KO 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엄마를 KO 시켜 버렸다.
한편, 남자는 자신의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중국으로 전화를 걸었고, 선전포고, 아니 폭탄을 던졌다.
.“아버지, 저 결혼할 겁니다”
“뭐?!! 무슨 소리야? 누구랑?”
“한국 여자예요”
“어떤 한국 여자?!! 여자친구 없었잖니? “
“있어요. 그리고 허락받으러 전화드린 거 아니고 저 이 여자랑 결혼할 거니 그렇게 알아주세요. 조만간 중국으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
남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크게 당황했고, 아는 모든 한국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라며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지인들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중국 남자를 등쳐먹으려는 꽃뱀일지도 모른다. 절대 결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라는 말들을 쏟아냈다.
솔직히,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지만 이 남자 ‘어리숙하고 세상 물절’ 모르지 않다. 모르면 내가 모르지…
한국으로 유학을 떠나 곧 졸업을 앞둔 아들이 갑자기 결혼하겠다며 선언하고, 부모님께 결혼 비용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거…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반대하시는 남자의 부모님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 결국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으로 가는 첫 비행이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가는 길이라니… 상상도 못 했던 여정이었다. 남자와 함께 탄 비행기는 늦은 오후, 중국 선양에 도착했다.공항 밖으로 나오니, 남자와 똑 닮은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
“니하오(你好)!” 나는 최대한 얌전하고 단정해 보이려 애쓰며,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남자의 아버지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인사를 받아주셨고, 우리를 차에 태워 식당으로 향하셨다.
차에 오르자마자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가 쏟아지는 속에서,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그들의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착한 곳은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Hot Pot)’ 식당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훠궈를 한입 넣는 순간,
‘와… 신세계!’‘나 중국 음식을 좋아했네‘
알아듣지 못하는 두 사람의 중국어가 쉴 새 없이 오가는 사이, 나는 혼자 야채와 고기를 국물에 익혀 먹으며 열중했다. 덕분에 심심할 틈도, 어색할 겨를도 없었다.분명 대화의 절반은 나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내 얘기를 눈앞에서 하고 있는데도 하나도 못 알아듣는 내 얘기라니! 너무 궁금했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고 훠궈만 맛있게 먹어댔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차에 올라타 남자의 고향을 향해 달렸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세 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그런데도 남자와 그의 아버지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 남자의 말 많음 DNA가 여기서 왔구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대화가 너무 궁금했던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아버님이랑 무슨 얘기했어? 그리고 내 첫인상은 어떠셨대?” 남자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마음에 드신대.”
“응? 왜? 나랑 제대로 대화도 안 나눠봤잖아?”
“키가 커서 좋대.”
”…뭐?!!”
키 큰 아들이 키 큰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합격?!!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한국에서 내 사진 찍어서 보내드릴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