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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하늘을 품은 남자를 만나기 까지(1)

by 도럽맘 Mar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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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에 입학한 8살 무렵, 엄마 손에 이끌려 주인집 딸이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가 가방을 내려놓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피아노를 띵까띵까 두드렸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음악 교재를 풀고,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떠들고 놀다가 불과 20미터도 안 떨어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4학년이 되던 어느 주일, 교회 반주자가 갑자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얼떨결에 피아노 앞에 앉아 떠듬거리며 찬송가를 쳤다.

그날이 내 생애 첫 반주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크게 틀리지 않고 무난히 쳤던 모양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꾸준히 교회 반주를 맡게 되었고, 그 속에서 피아노와 더욱 가까워졌다.


시간이 흐르고, 이사를 한 후에는 이대 출신의 피아노 선생님께 배우며 본격적으로 피아노 전공자의 길로 들어섰다. 내 기억 속 90년대는 CCM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로, 각 교회마다 악기팀이 생기고 찬양 문화가 활발해지던 때였다.


매주 화요일이면 강남에 있는 ‘예수전도단’ 찬양 집회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했다. 나도 그 흐름 속에 몸을 실어 찬양을 배우고 반주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나는 보다 집중적으로 교회 음악을 배우고 싶어 클래식 피아노에서 재즈 피아노로 전공을 변경했다. 실용음악을 전공한 선생님들에게 레슨을 받으며 입시를 준비하던 중, 2002년이 찾아왔다.


그해 여름, 대한민국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강남역, 홍대, 대학로 어디를 가도 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가득했고, 나도 그 흐름에 휩쓸려 신나게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렇게 입시생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월드컵 열기를 만끽한 결과는… ‘재수’. 하지만 다행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도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많았고, 우리는 음악이라는 힘으로 더욱 끈끈하게 뭉쳐 유쾌한 재수 생활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겉멋만 잔뜩 든 음악하는 재수생이 되었다. 친구들과 합주를 하고, 홍대에서 공연을 보고, 맥주 한 잔씩 기울이며 ‘성인’이 된 자유를 실컷 만끽했다.


교회는 그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전락했고, 반주를 할 때도 시시한 코드와 단조로운 가사에 싫증을 내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때론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피곤에 절어 반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탈의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마침 그 시기에 오래 다니던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은 미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는 한인 교회의 지교회로, 서울에 새롭게 개척된 교회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반주를 맡게 되었고, 그와 함께 내 삶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교회의 원로 목사님은 이미 은퇴하셨지만, 멈추지 않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교사들을 돕고 계셨다.


연로한 나이에 암투병까지 겹쳐 손바닥의 살갗이 다 벗겨질 정도였지만, 그분의 손에서 마이크는 단 한 순간도 놓이지 않았다.


당시 22살이었던 나는 여전히 친구들과 합주하며 노는 것이 즐거웠고, ‘성인’이 된 자유를 만끽하는 데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긴 후, 내 안에서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선교지를 다니실 때마다 나를 동행자로 불러주셨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뉴질랜드, 유럽, 대만, 필리핀 등 여러 나라의 선교 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각국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님들의 노고와 수고를 직접 보며,


그들의 삶이 얼마나 열정과 희생으로 가득한지 깨닫게 되었다. 선교사님들의 헌신이 존경스럽고 감사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나는 믿음도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야. 선교는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이야.’


나는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그 길을 갈 수 없다고 확신했다. 대신, 피아노를 열심히 치고 공부해서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부자가 된 후, 선교사님들을 돕는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내 인생도 충분히 즐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의 기도제목은 이러했다.


‘하나님,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


‘하나님, 전문직을 가진 똑똑하고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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