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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한달만에 접한 시아버지의 암소식

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1)

by 도럽맘 Mar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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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자는 성탄절 다음 날인 12월 26일 저녁 6시에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교제를 시작한 지 불과 4개월 만이었다. 짧은 연애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철없던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가정을 이루려면 서로에게 모든 것이 열려 있고 솔직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가리고 가면을 쓴 채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이제야 그게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깨달았다.


‘하늘을 품은 남자’는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편안했다. 이전과 다르게 나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 고급 주택이 아닌, 반지하방으로 내려가는 허름한 문 앞에서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았다. 내 모든 모습, 심지어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도 그에게 드러냈지만,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걸어온 삶과 내가 살아온 인생을 하나도 빠짐없이 토해내며, 그렇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뜨겁고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직스럽고 편안한 사랑이 나를 감싸주었다. 하늘같이 넓은 가슴과 두 팔을 가진 그에게 나는 푹 안겨 위로를 받았다.


결혼식을 올린 후 우리는 당분간 친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졸업 후 중국으로 들어가 신혼 생활을 시작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신혼이니 좋은 곳에서 자야 한다”며 크고 좋은 침대와 화장대를 작은 방에 마련해 주셨고, 우리는 그곳에서 짧은 신혼 기간을 보내며 함께 중국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결혼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중국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결혼식 이후에 중국에 돌아가 몸이 좋지 않으셔서 검사를 받으셨는데 인두암 3기 판정을 받으셨다는 얘기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바로 한 달 전 결혼식에서 아버지는 우렁찬 목소리로 양가 대표로 인사를 전하셨는데..비록 중국어였지만, 웨딩홀이 떠나가도록 감사 인사를 하시는 모습에 지인들과 친척들은 놀라워하셨다.


그렇게 활기차시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신 아버지가 ‘인두암 3기’라니…


나와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선양으로 올라가 방사선 항암 치료를 받으시기로 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즉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남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선양으로 향했다.



1월 말, 중국 선양의 추위는 온몸을 얼어붙게 할 만큼 매서웠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머물고 계신 병원 앞 임시 숙소로 향했다. 그곳은 2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방이었다. 한쪽에는 1인용 침대와 간이 침대가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 위아래로 간단한 살림살이와 식기가 정리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곳에서 몇 개월간 방사선 치료를 받으셔야 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며느리가 찾아왔다고 반가워하시는 두 분은,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괜찮아 보이는 중국 식당으로 데려가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주문해 주셨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로 입맛이 없으신 데다, 암이 퍼진 부위로 인해 말을 하시기도 어려운 아버지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본래 목소리가 크고 말씀이 많으신 분이었다. 아들을 만나면 종교 이야기, 정치 이야기로 밤새 토론하는 걸 즐기시던 분이셨다. 그런데 이제는 한마디도 제대로 하실 수 없다니… 한 달 사이에 급격히 야위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식사를 마친 후 부모님은 숙소로 돌아가셨고, 우리는 뼛속까지 시려오는 추위를 뚫고 시내에 있는 KFC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나는 F4 용지를 꺼내 들고 조용히 글을 써내려갔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였다. 나는 결혼 전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 번만 뵈었기에, 두 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직접 뵌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남자의 부모님을 존경하고, 마음 깊이 좋아했다.


남자가 내게 들려준 부모님의 삶과 신념은 내가 태어난 기독교 가정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깊은 사랑이었다. 정직과 섬김, 절제와 인내, 성실과 감사가 두 분의 삶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나는 비록 직접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분들을 사랑했고, 그분들의 삶을 존경했다.


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인두암’이라는 병명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암세포가 코 뒤쪽으로 퍼져 있어 수술은 불가능하고, 오직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3기라는 말을 들으니, 완치가 가능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향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글을 써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이 편지를 통해 아버지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에 대해 적어나갔다. 글로 전할 말이 많았던 걸까.


어느새 편지는 세 장 가까이 빼곡해졌다. 편지를 다 쓰자, 남자는 노트북을 열어 내 글을 중국어로 다시 적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중국어 편지를 한 글자씩 따라 써 내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오를 때까지, 나는 한 자 한 자 정성껏 베껴 썼다.


편지를 곱게 접어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남자와 함께 다시 부모님이 계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가방에서 정성껏 접어둔 편지 세 장을 꺼내 아버지께 건넸다.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장문의 손편지를 받아 들고 적잖이 놀라신 듯했다. 아들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긴 편지를 한국 며느리가 직접 써서 전해주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감동스러우셨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의자에 앉아, 꼬불꼬불 적힌 한자를 하나씩 천천히 읽어나가셨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렵게 목소리를 내시며 연거푸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


남자와 대화를 나눌 때면 늘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하며, 칼 마르크스주의와 자신의 철학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시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편지를 다 읽고 난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나는 단번에 그 끄덕임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아버지의 눈물, 감사 인사, 그리고 조용한 끄덕임. 그것은 곧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그분을, 한국 며느리가 전한 그분을 믿겠다는 고백이었다.


그날 밤, 나와 남자, 그리고 어머니는 조심스레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감사하며 함께 기도했다.


그날은 남자의 가족이 모두 예수를 믿는 가정으로 거듭난 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남자가 내게 말한 ‘진정한 삶의 가치‘ 를 이루며 살아가자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인 알게된 계기이자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된 시발점이 된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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