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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행과 새로운 여행

아빠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

by 도럽맘

막상 미국 유학생활을 정리하려 하니, 생각보다 짐이 많지 않았다. 바닥에 깔고 쓴 오래된 퀸 사이즈의 매트리스와 작은 책상은 내가 살던 방으로 새로 들어올 룸메이트에게 넘기면 그만이었다.


결국 남은 건 책 몇 권과 옷가지들. 5년을 살았는데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처럼 커리어 두 개가 전부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얼마나 절약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유학생활을 버텨왔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나는 어느새 미니멀 라이프를 살아온 것이다.


나와 남자는 유학생활 내내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하지 못했다. 돈도, 시간도 넉넉지 않아 멀리 떠나는 건 늘 사치처럼 느껴졌고, 그나마 여유가 생기면 산타바바라나 샌디에이고 같은 근처 도시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소소한 여행조차도 우리에겐 충분히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기에.


그러다 드디어, 미국을 떠나기 전 큰맘 먹고 동부,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처음 미국에 올 때 들고 온 외화는 6천 불 남짓. 그리고 5년 후, 통장에는 놀랍게도 비슷한 액수의 돈이 남아 있었다.


안쓰고 안먹어가며 모은 돈이였다.우리는 처음으로 돈 걱정 없이 여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정했다. 그렇게 나와 남자는 5년 유학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할 첫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났다.


뉴욕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모든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도착 첫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만 기절하듯 쓰러지고 말았다. 심한 몸살이 난 것이가. 어찌나 아팠는지 이틀 동안 꼼짝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그렇다고 뉴욕까지 왔는데 둘 다 숙소에만 머물 수가 없었기에 남자는 내 몫까지 열심히 센트럴파크며 박물관 등을 돌며 나홀로 뉴욕 여행을 다녔다. 그러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지막 날이 12월 31일이었다는 것. 그날은 몸이 조금 회복되어, 해가 어둑해지는 시건에 뉴욕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그곳에는 2015년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든 수 많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태어나서 연말을 교회가 아닌 밖에서 보낸 건 처음있는 날이라 어떨떨했지만 설레고 흥분이 되었다.


장소가 어디든 우리 부부를 지켜주시고 미국 유학생활을 잘 끝마칠 수 있기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히며 내 생에 화려한 연말을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짧았던 뉴욕 여행을 마치고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우리는 본격적으로 미국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미국에서 만났던 귀한 인연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식사 자리를 가졌고, 그동안 교제했던 그들근 우리의 든든한 기도자이자 동역자가 되어 주었다.


이번엔 LAX 출국장에는 남자 홀로가 아닌 나와 함께 섰다. 새벽 비행기라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줄 사람 하나 없었지만 우리는 잠들어 있는 캘리포니아를 향해 힘찬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중국으로 향했다..


그전에 먼저 한국에 경유로 며칠 머물렀다. 나는 가장 먼저 아빠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아빠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지 못했던 나는, 납골당에 안치되어진 아빠 유골함 앞에 섰다.


“아빠… 내가 너무 늦었지. 떠나는 길에 인사도 못 해서 미안해… 지금은 어때? 천국에서 예수님과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어? 더는 아프지도, 외롭지도 않겠지? 나 이제 곧 중국으로 떠나.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지켜봐 줘. 그리고… 사랑해.”


그 말을 다 하고 나서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아빠를 향한 울분과 그리움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고, 하염없이 울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 걸까. 몇 달 후, 아빠가 꿈에 나타나셨다.가장 건강하고 빛나던 40대의 모습으로,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계셨다.


그 시절 아빠는 매일 이른 아침, 검정색 개인 모범택시를 정성껏 걸레로 닦으셨고, 내가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 내 손에 오백 원, 천 원씩 꼭 쥐여주셨다. 택시 기사에게는 꼭 필요한 잔돈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꿈속에서 아빠와 나는 손을 잡고 동네 교회로 걸어갔다

작은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교회 앞에 도착하자, 아빠는 갑자기 내 손을 놓으며 말씀하셨다.


“먼저 교회로 들어가. 아빠는 위에서 기다릴게.”


그러고는 빛이 쏟아지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셨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내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새벽, 울며 눈을 떴다. 그리고 옆에서 곤희 자고 있던 남자를 꼭 붙잡고,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도는 피아노 소리에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 때까지, 그렇게 울며 아빠를 불러댔다.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아빠를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었다.


짧은 한국 일정을 마친 우리는 남자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시부모님과 오랜만의 교제가 있었다. 결혼을 한지 6년이 지났지만 하나뿐인 며느리는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인 며느리였다.


그래도 6년동안 중국어는 늘지 않았지만 능통성과 능글맞음은 늘은터.. 나는 틈만 나면 시부모님과 함께 카드게임을 하며 무안가를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낯가림 심하신 어머니는 나와 카드게임을 하시면 매번 묻는 질문이 있었다.


“한국, 미국 ,중국 중에 어느 나라가 좋니”

“(나) 중국이요”

“친정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사는 거 괜찮니!“

“네. 괜찮아요. 중국에서는 부모님이 저의 아빠, 엄마 이세요. “


그러면 시어머니의 얼굴엔 언제나 환한 웃음이 피어 있었다


시댁도 만나고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우리는 다시 커리어 가방 두 개를 끌고 무작정 기차를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 하나님이 감동 주시는 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자는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상하이에서 시작해 여러 도시를 여행했고 마침내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의 사역지를 ‘이곳’으로 정하기로 마음먹고 가방을 풀었다.


하지만, 그날의 베이징 미세먼지 지수는 400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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