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14)
중칭에서의 가슴 아픈 사건들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졸업 연주인 리사이틀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마음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남자의 상황이 계속해서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는 중칭 사역을 갑작스럽게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말 그대로 ‘은둔’하는 삶을 시작했다. 기독교를 접하고,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수많은 은혜와 기적을 체험해 왔던 그에게 이번 시련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전심으로 헌신하고 따랐던 선배 선교사와 교회의 장로님의 이중적인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한 그는, 이전에 겪었던 어떤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큰 혼란 속에 빠졌다.
그 사건은 그가 평생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했던 믿음과 결단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사실, 종교인의 삶은 누구에게나 큰 결단이 필요한 길이다.
가족의 응원이 절실하고, 때로는 반대를 무릅쓰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중국인이라는 점은 이 길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중국 사회에서 종교인은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일쑤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그 나라에서, ‘돈을 잘 버는 직업’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의 가족은 흔히 말하는 엘리트 집안이었다. 의사, 교사, 공무원으로 구성된 중산층 가정에서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지만 결국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심지어는 창피한 선택이었다. 겉으로는 그의 결정을 존중하는 듯 보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아들의 생활비를 보내려 했다. 종교인의 삶을 ‘돈도 못 버는 거지 같은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친척들에게는 그저 ‘한국과 비즈니스를 한다’는 말만 남겼다. 그조차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 나라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그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한국이나 미국이라면 같은 길을 걷는 선후배 목사들이 많아 서로 공감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가 있던 도시는 전혀 달랐다.
인구 10만 명 남짓한 도시에, 30대 크리스천 목사는 그 혼자였다. 그에게는 고민을 털어놓을 동료도, 조언을 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결국 그는 스스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깊은 암흑 속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건, 중칭의 선배 선교사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해를 끼쳤다는 사실이었다. 그 선교사는 남자에 대한 루머를 퍼뜨리며, 우리가 미국에서 파송받은 모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담임 목사님에게 ‘그를 선교사에서 박탈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전했다.
나는 다음 날 바로 담임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목사님은 조용히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피터는 그럴 사람이 아닌 거 안다. 걱정 말라. 우리는 너희를 아끼고 믿는다.”
그 말은 마치 무너진 내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담요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어렵고 힘들었겠냐”며 나를 오히려 위로해 주신 목사님 덕분에, 나는 미국 교회의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다시 안정을 찾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었다. ‘은둔’ 하던 삶을 청산하고 온전하게 회복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은둔 생활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날 남자는 용기를 내어 주일에 동네 교회를 찾았다. 작은 소도시라 교회는 몇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삼자교회와 가정교회가 마주 본 하나의 건물 안에 나란히 있었다.
그는 망설임 끝에 가정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약 2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대부분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중년 여성들이었다. 젊은 남성 신도는 시장에서 두부를 파는 30대 남자 한 명, 그리고 몇 명의 여학생이 전부였다.
남자가 예배에 참석하자, 교회 안은 조용한 술렁임으로 가득 찼다. 말끔한 외모에, 큰 키를 가진 젊은 30대 남성이 갑자기 교회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초신자도 아닌 것 같고, 평범한 방문자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특별해 보였던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 교회에는 정식 목회자가 없었다. 중국의 가정교회에서는 종종 신학을 독학하거나 오랜 신앙 경력을 가진 평신도들이 교회를 이끄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을 ‘동공(同工)’이라 부른다. 이 교회에는 다섯 명의 여성 동공들이 있었고, 그들은 매주 돌아가며 설교를 맡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 그들은 남자에게 설교를 부탁했고, 교회 운영에 대한 조언도 해달라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남자는 여전히 중칭에서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감당할 여력이 없었지만, 그들의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이 기회가 중국의 로컬 교회, 특히 가정교회를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남자를 서서히 ‘운둔’의 시간에서 끌어내기 시작하셨다.
이후 그는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맡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동공들과 회의하며 교회 운영과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이 교회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리더들의 ‘권력 다툼’이었다. 다섯 명의 여성 리더들은 각자의 해석과 주장으로 설교를 준비했지만, 문제는 그 설교가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상대방의 설교를 은근히 비난하거나,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교회 내 분위기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겉으로는 하나의 팀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려는 기운이 감돌았다. 영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조화가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헌금 관리였다. 교회가 창립된 이래로, 두 명의 할머니 성도가 헌금을 관리해 왔다. 그들은 예산 사용뿐 아니라 물품 구매나 행사 진행에도 일일이 간섭하고 따라붙는다고 했다. 남자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과 미국의 교회에서 체계적인 재정 시스템을 보고 배워온 그에게, 이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이 이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교회 전반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신학교에서는 ‘신학’만 빠르게 가르쳤지, 막상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고 세워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회론’은 철저히 비워져 있었다.
훈련도 받지 못한 채 리더가 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었고, 그 안에서 벌어진 혼란은 결국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남자는 이 과정을 통해 중국 교회의 현실을 진짜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국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경험했던 것들이 어떻게 이곳에 접목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고, 앞으로의 사역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 교회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상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 그는 다시 자신의 부르심을 붙잡았고, 믿음은 무너짐 위에 새롭게 쌓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