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검정색입니다, 선교사님”

하늘을 품은 남자 이야기 (13)

by 도럽맘

미국 유학 2년 차가 되던 해, 내가 섬기던 교회에 새로운 음악 목사님이 오셨다. 그분은 1세대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 프랑스,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성장한 2세 MK(Missionary Kid)였다. 브라질에서는 오랫동안 찬양 사역을 하셨고, 무엇보다 ‘식탁 교제’를 중심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분이셨다.


박 목사님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고, 짧게는 반년, 길게는 2~3년씩 함께 지내는 학생들로 집은 늘 포화 상태였다. 그러나 그곳은 누구든지 들르면 사랑과 칭찬으로 마음이 채워지고, 행복한 표정으로 나가게 되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나도 박 목사님을 진심으로 따랐다. 항상 밝고 따뜻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셨기에 그분과의 교제는 언제나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목사님은 나와 남자를 저녁 무렵 커피숍으로 부르셨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약속 장소로 갔고, 목사님은 우리에게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보였다.


“피터, 그레이스. 언젠가 너희가 중국에 선교를 가게 된다면, 젊고 재주 많은 너희를 ‘이용’하려는 선교사들이 있을 수도 있어. 그렇기 때문에 지금 미국에 있는 동안 실력을 키워야 해. 누구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도록 단단해져야 해.”


그날의 대화는 길었지만, 나는 그 말 한마디가 뇌리에 깊이 박혔다. 사실, 그때의 우리는 세상 물정을 잘 알 리 없는 20대 중후반의 청년들이었다. 말하자면, 겉모습만 어른이었지 마음은 아직도 어린아이였다. 나는 속으로 ‘설마, 하나님께 헌신한 선교사들이 후배들을 이용할 리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할 위치가 아니라, 이끌어야 할 리더로 준비되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짐이 현실이 되는 데는 채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선교사이자 사실상 ‘현지인 목사’였다. 한국과 미국에서 유학하며 한국어와 영어는 물론, 다양한 문화를 이해했고, 중국어도 능통했다. 그런 남자를 중국에서 탐내는 선배 선교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우리가 결혼 전부터 존경하던 1세대 선배 선교사도 있었다. 그분은 남자에게 자신이 사역 중인 중칭으로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남자는 그분을 깊이 존경했기에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 미국의 모교회 목사님은 그 제안에 반대하셨다. 그래도 우리는 그 반대를 무릅쓰고 중칭으로 떠났고, 확신 없이 도착한 그곳에서 남자는 혹독한 현실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선배 선교사는 중국 사역만 30년에 가까운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그분의 간증은 누구나 감동할 만큼 대단했고, 나 또한 20대 초반에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감동하고 존경했다. 한국에 나오시면 모아둔 용돈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헌금까지 드리며 나는 그분의 ‘찐팬’처럼 지냈다. 그래서 남자가 그분의 사역지로 간다는 소식에 나는 기쁨과 기대에 부풀었다.


처음 중칭에 도착했을 때, 선배 선교사와 함께,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크게 하던 장로님과 비서, 그리고 또 다른 김선교사까지 모두 분주하고 흥분된 분위기였다. 그들은 중칭이라는 ‘쇼핑 천국’에서 한국 옷과 제품을 판매하는 ‘한국성 쇼핑몰’을 열려 하고 있었고, 수익금 일부를 선교에 사용하겠다는 이름 아래 ‘비즈니스 선교’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상가를 알아보고 계약 직전까지도 계획은 탄탄해 보였다. 그 과정에서 중국 현지 서류 문제를 남자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인간의 노력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실이 드러났다. 계약 직전, 상가 주인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다른 한국인에게 공간을 넘겼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선배 선교사와 장로님은 점차 불신과 의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잠식했다. 이미 많은 자금이 투입된 상황에서, 계약은 무산되었고, 다시 시작하려면 시간과 돈이 몇 배는 더 들어야 했다.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타깃은 함께 사역하던 김선교사님이였다 . 무려 7년 넘게 그들을 따르며 헌신해온 인물이었지만, 단 한순간에 버려졌다.


남자는 아마도 그들 눈에 아직 ‘쓸모’가 있어 보였는지 일단은 곁에 두기로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다. 진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미 그들의 결정은 굳어 있었다.


어느 날, 선배 선교사는 남자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피터, 지금 내 핸드폰이 무슨 색이지?”


“검정색입니다.”


“아니야, 하얀색이야. 다시 말해봐. 내 핸드폰 색이 뭐지?”


“선교사님, 검정색입니다. 분명히 검정색이에요. 저는 절대 하얀색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선배 선교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 남자에게 분노가 섞인 실망이 보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남자도 버림받았다.


그 방식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비열했다. 처음에는 예의를 갖추던 장로님까지 돌변하여 남자를 협박했고, 함께 사역하던 김선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라고 종용했다. 도대체 무엇을 실토하라는 것인지, 왜 두 젊은 선교사의 앞날을 이렇게까지 망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명예와 돈,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한순간에 존경받던 선교사에서 두려운 존재로 변해버렸다.


남자는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쓸 각오를 했지만, 결국 희생양이 된 것은 그 김선교사였다. 그의 중국 사역은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고 결국 가정과 명예까지 망가져버렸다.


이 일은 내가 중칭을 떠나기 불과 일주일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모든 일이 정리되기 전, 미국으로 먼저 돌아와야 했고, 남자 곁에 끝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내가 떠난 후, 중칭에 남아 있던 사역자들과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비즈니스가 실패하자, 선교도 함께 무너졌다.


비즈니스와 선교. 그 두 단어는 본질부터가 달랐다. 결코 섞일 수 없는 기름과 물처럼, 두 개념은 어설프게 엮였고 결국 무너졌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욕망과 탐심을 감추려 했던 죄악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남자는 자신의 첫 번째 사역지에서 교만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하며 고향으로 돌아갔했다. 그 후로 남자는 오랫동안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단지 실패의 기록만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무너짐 속에서 진짜 선교가 무엇인지,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셨다. 인간의 손으로 쌓아올린 계획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선하고 완전한지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