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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의 시작

왕징에서 장착하기까지

by 도럽맘

눈이 따끔거리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하늘은 노랗고, 마치 누군가 내 코 앞에서 오래된 방석을 탈탈 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창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캘리포니아의 하늘을 5년 동안 보며 살아왔기에, 이 노란 하늘은 너무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이게 맞나? 우리, 정말 여기서 산다고?’

‘이러다가 폐에 이상 생기는 거 아냐?’


당장 남편과 함께 약국에 들러 마스크 두 개를 사서 얼굴을 가렸다.


며칠 간 베이징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도시형 인간인 나조차, 베이징은 “진짜 크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만큼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고, 건물은 크고 많았다.

중국이 땅이 넓다지만, 베이징 인구가 한국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는 말이 전혀 실감 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가 첫 도시로 방문했던 상하이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베이징보다 더 개방적이고 날씨도 따뜻했으며, 대학과 회사가 많아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깊은 감동은 오지 않았다.


사실, 남편은 오랫동안 ‘베이징’을 두고 기도해 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여러 집회에 참석하면서 그는 하나의 서원을 드렸다.


“10년 뒤,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찬양 집회를 열겠습니다.”


그 기도를 드린 해, 그는 방학을 이용해 실제로 베이징을 방문했고 천안문 앞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그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뒤, 베이징에 도착한 남편은 나와 함께 마스크를 낀 채 도심을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온 후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여기서 사역하면 어떨까?”


사실, 나도 미세먼지만 제외하면 베이징이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는 생기가 넘쳤고, 문화의 중심지답게 다채로운 에너지가 있었다. 남편과 함께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 우리는 다시 노트북을 열고 베이징 지도를 함께 바라보았다.


이제는 ‘베이징 어디에서 살지’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가장 놀랐던 건, 같은 도시인데도 동네마다 분위기가 정말 달랐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냥 ‘수도니까 크겠지’ 싶었는데, 실제로는 도시 하나 안에 여러 개의 도시가 있는 느낌이었다.


둥청구에 갔을 땐 “아, 여기가 진짜 베이징이구나” 싶었다. 자금성, 천안문, 왕푸징 거리까지 모두가 알고 있는 베이징의 상징들이 이곳에 다 있었다.


시청구는 좀 더 정돈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정부청사나 금융기관이 많아서 도시가 정장을 입은 것처럼 말쑥했다. 하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후퉁도 여전했고, 시단 거리에는 쇼핑객들로 북적였다. 고요함과 활기가 묘하게 공존하는 동네였다.


차오양구는 국제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지하철 타고 산리툰에 가면 영어가 들렸고, 분위기는 거의 서울의 이태원을 연상케 했다. 798 예술구에는 벽화와 조형물이 가득했고, 도시 한복판에서 젊은 감성이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하이뎬구는 그야말로 ‘공부 잘하는 동네’ 같았다. 칭화대, 베이징대 같은 명문대학이 있고, 중관촌에는 IT 기업들과 전자상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책방도 많고, 캠퍼스 안 산책길은 조용하고 예뻐서 사색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왕징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한인타운’이고, 우리가 잠시 적응하는 동안 사역할 교회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우리 부부는 커리어 가방을 들고 왕징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캐나다에서 오신 한국인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지금은 누가 소개해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분들은 우리 부부에게 “잠시 저희 집에 머물며 왕징에서 살 집을 찾으세요”라고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우리는 약 2주간 선교사님의 집에서 지내며 집을 찾기 시작했는데, 형편에 맞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베이징의 집세는 생각보다 비쌌고,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들이 많아 마음에 드는 곳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한국 국제학교 바로 옆의 작은 단지 안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작은 원룸이었지만 16층이라 전망이 좋았고,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시원하게 뚫린 대로와 오른쪽으로는 국제학교 운동장, 올림픽 공원이 보였다.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입주했다.

이후엔 매일 아침, 멀리 보이는 올림픽 공원 빌딩이 선명하게 보이면 ‘오늘은 미세먼지가 적구나’ 하고, 안 보이면 ‘300 넘겠네’ 하는 식으로 공기 상태를 짐작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날은 탁했지만 햇살은 잘 들어오던 그 아파트에서, 베이징에서의 첫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낯설지만 설레는 도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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