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은 붙들고, 생각은 밝게
어제 운동을 하다 발가락에 부상을 입었다.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검사 결과는 골절. 핀을 박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6주간은 절대 걷지 말아야 하며, 물이 닿아서도 안 되고, 깁스와 목발은 필수라는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정된 일정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고, 당장 무엇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생각이 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받아들이자.'
이 사고는 나의 모든 루틴을 바꾸어놓았다. 매주 빠짐없이 다니던 운동은 중단했고, 성악 수업도 멈춰야 했다. 외부 일정은 하나씩 조율해 가며 정리 중이다. 입원과 회복 기간 동안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일을 앞당겨 처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놓지 않은 일들이 있다. 대학생을 교육하고 멘토링하는 일, 예배드리는 일, 그리고 성가대 봉사. 이 세 가지는 내 삶의 방향과 정체성을 붙잡아주는 사명과도 같은 일들이다. 특히 이번 주부터는 한국대학생인재협회의 새로운 기수가 시작된다. 100여 명의 대학생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 서 있을 수 없어 앉아서 강의해야겠지만, 보기 좋아 보이는 것보다 내가 맡은 일을 후회 없이 감당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수술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말들이 고마우면서도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6주가 아니라 재활까지 하면 두세 달은 꼼짝도 못 할 거야", "그 고생을 너는 어떻게 버틸래?" 같은 말들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잘 버텨볼게요. 씩씩하게 이겨내야죠."라고 밝게 말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런 일이 왜 너한테 생기냐"는 말에는 웃으며 답했다. "저라고 이런 일이 없을 법 있나요. 뭐, 어쩌겠어요. 잘 요양해 볼게요."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주변의 걱정과 위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 말들 속에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거나 걱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읽어내고 현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불행은 찾아올 수 있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을 스스로 상기해야 한다.
깁스를 한 채 생활하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목발을 짚고 있으니 라면 하나 끓여주는 일도 버겁고, 집안을 조금만 돌아다녀도 땀이 난다. 씻기도 여의치 않아 급히 방수 커버를 주문했다. 몸이 불편하면 생각도 함께 예민해지고, 감정도 부정적으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의식적으로 생각을 붙잡고, 나 자신을 긍정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아들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약국에 다녀오고, 장 본 물건을 정리해 주고, 식기세척기에 그릇도 차곡차곡 넣어주었다. "엄마 움직이지 마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씀하세요."라고 말해주는 두 아들의 말이 참 고마웠다. 집안일을 바삐 돕던 둘째는 "엄마가 왜 그렇게 피곤해하셨는지 알겠어요."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큰아들은 엄마가 수술을 받는다는 말에 "자신의 80%가 사라지는 기분, 뭔가 자기 마음이 텅 비는 기분"이라며 눈물을 훌쩍였다. 아이들의 사랑이 내 마음을 꽉 채워주었다.
몸은 아프고 생활은 불편해졌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과의 유대가 더 깊어졌다. 가족애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고, 삶을 지탱하는 사명의 본질도 되새기게 되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나보다 훨씬 더 깊은 고통과 불편함, 심각한 질병이나 사고를 겪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나의 이번 부상은 상대적으로 경미한 편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고통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멈춤'이 불러오는 혼란과 정서적 동요는 있다는 점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이 멈춤의 시간을, 나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고 감당하려 하는지 솔직하게 기록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번 일을 겪으며 문득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평소에 내 개인적인 루틴과 욕구, 성취에 더 많은 중심을 두고 살아왔다면, 이번 사고는 훨씬 더 짜증스럽고 우울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평소에 운동 루틴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고, 운동을 단순한 건강관리 그 이상으로 여긴다. 특히 수영의 경우, 이제 막 감을 잡고 반 레벨을 올려보려던 찰나였기에 타격이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운동을 못하게 된 상황이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 자신도 이 점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운동선수가 아니다. 다시 천천히 회복하면 되는 일이고, 그 과정마저도 내 삶의 일부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4년 전만 해도 나는 사실상 '숨쉬기 운동'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한두 달 운동을 못한다고 해서 대체 얼마나 큰일이겠는가. 운동은 결국 건강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지금은 잘 쉬는 것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금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성장이나 성취, 영달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스트레스의 크기도 그만큼 커진다. 흐름이 끊긴다는 사실, 멈췄다는 사실 자체가 타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삶의 중심이 사명과 관계, 그리고 존재 자체의 의미에 놓여 있다면, 잠시 멈춤은 멈춤일 뿐이지 실패도, 손실도 아니다. 오히려 재정비의 시간이고, 회복의 기회다.
인생은 예고 없이 무너질 수 있는 다리 위를 건너는 것과 같다. 중요한 건 그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리를 건너는 내 자세다. 사명은 끝까지 붙들어야 하고, 생각은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은 곧 마음이 부정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늘 의식적으로 밝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몸이 아픈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고통은 결국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마음을 관리하는 일은 순간순간 흔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불편과 고통이 타인에게 날을 세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흔들리더라도, 나는 무너지지 않겠다. 삶의 중심은 고통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내가 무엇을 붙드는지에 달려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