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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noh Jan 16. 2023

연어

안도현의 연어를 읽다 말고 삶을 생각함

우화 속  주인공


개구리는 우물에 대한 프레임 때문에

인간들과 비교하기 좋은   

관념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전제된 편견 때문에

속담 속에

그가 소유한 우물이 좁고 하늘이 그만큼만 보이니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인간들이 서로들에게 무시하는 기준의 예가 된다.


이때 뜻밖에 의미에 집착을 하다 보면

그 속담밖 다양한 담론을 찾아낼 수 있다.


다람쥐는 챗바퀴의 주인공으로 회자된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게 운동기구를 돌릴 뿐인데

인간은 그걸 또 반복운동의 진수로

무시를 한다.

그의 입장에선 놀아준 것뿐인데.


다람쥐뿐만 아니라

모든 생겨난 생명체는 다 저마다의 궤도가 있다.


자신만의 궤도를 돌고 돌다가

그 궤도 어느 곳에 문득 멈추는 날 자신의 소우주는 소멸하고 육체는 기화된다.


내 생각에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차이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 뿐이다.

어떤 인간의 경우

인간의 정신이라는 궤도 범주가 다른 어느 생명체보다 길기에

자연사에 엄청난 스토리를 전하는 것뿐이다.

그 족적이 일반화의 오류를 거쳐

길고 짧음은 그 속에 담긴

축적의 퀄리티와 상관없음에도

다수가 그렇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선망의 기준이 되어

우쭐되는 존재감이 되고만 것이다.

오로지 인간의 시야인 것.

연어들은 이것을 어떻게 번역할지 알 수 없다.

강산에가 노래할 때

그 쿵짝 되는 전주에서 전율을 느끼는 것은

잠시 교점의 블랙홀이 발생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만.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사이즈를 좀 높게 착각하고

연어보다도 많은 일들을 겪는다 여기며

자신들끼리는 감정의 쏠림을 지나치게 발생시키는 바람에~

심지어

인간이면서도 연어의 눈을 통해 이야기할 재주도 가지고 뿌듯해 하고 있다.

모든 동식물의 눈을 빌려 세상을 주절주절 말한다.



그러나 지구의 점유율 높은 인간의 시야는

강과 바다를 거슬러 오르는

패턴화 된   연어의 회귀보다

다람쥐 쳇바퀴보다

개구리의 우물보다

그 궤도가 꼭 더 방대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걸 진작에 안다.


종종 어떤 이는 마치 연어보다도

짧은 주기를 갖고 태어난 듯

제 인생을 쩔쩔매고

돌고 있기도 하니

궤도의 길이나 방법으로

다른 피조물보다 나을 것도 없고

각 생명체의 가치를 비례한다고만 볼 수도 없다.


가끔 생명체의 의미가 어떤 기준으로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을지

고민스러워질 때가 있다.


안도현의 연어를 읽으며

생각보다 뻔한 스토리에 지루함도 느끼지만


역시 거꾸로 흐르는 힘찬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그들만의 세계에

가끔 빙의되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생동감

때문에 사는 게 재미있을 수 있겠다 싶어 진다.


자기 주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사는 인간의 궤도가

가장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생물의 세계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최재천 박사가 하는 말들을 곱게 씹어보면

피조물 인간도 누군가의 눈에서는

다람쥐나 연어나 혹은 개구리쯤으로도

보일 급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그래서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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