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수첩만 해도 몇 개가 먼지 뒤집어쓰고 꽂혀 있었고 보지도 않는 소책자는 책등이 다 노랗게 바래 글씨도 뵈지 않는다.
그 틈에서도 수첩에 꽂힌 사진 몇 장이 나온다.
이쁘게 웃고 있는 이 아이가 이렇게 컸네!
"너 어릴 때 엄마가 많이 무서웠니?"
"혼날 땐 무서웠지, 왜?"
"응, 애교 부리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어! 하도 내가 야단쳐서 요즘엔 애교를 안 부리나 해서."
"그나마 지금 엄마테 많이 표현한다고 생각하는데."
애기라서 더 많이 웃었나 보다.
그때 나도 많이 웃었을지 몰라.
수첩 속에 끼어있던 끄적거림 몇 장도 몽땅
과거의 한 때일 뿐. 스쳐 지나간 거기까지의 인연의
자취를 마지막으로 보며 과감히 박스에 던져 본다.
요즘 아이는 친구 문제며 성적이며 자기 생각과 같지 않은 한계에 직면하며 아파하고 있는 중이다.
생을 더 정열적으로 살고 싶다는 아이의 주변에
함께 할 동료가 없고, 믿었던 친구도 제 아이디어 쏙쏙 가져갈 뿐, 기생이 아닌 공생을 할 이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이가 느끼고 있다. 아! 굳건히 키우려 했으나 나약했던 모계의 DNA가 흐르는 것 같아 아차 싶었다. 어쩌나, 저 아이는 나보다 똑똑해서 덜 아파할 줄 알았건만ㅠㅠ
한 발짝 뒤에 선 채 바라만 보는 인생의 평행선은 곧 우리 모녀만의 일은 아닐 테지만, 나는 좀 뭔가 에너지를 주고 싶었다. 약간의 출탁통시만 해주기로! 일상적인 쇼핑. 위로? 바람 쐬기?
어쩔 수 없이 아이는 혼자 제 생채기를 아물어 간다. 역시 난 바라보기만 할 뿐!
아이의 한 때도 어딘가 정리해 쌓아 놓겠지!
지금의 공간 확보를 위해
먼지 쌓인 흔적을 이젠 바로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럴까? 좁으니까……그리고 스쳐 지나갔으니까.
수첩 2
묵은 감정이 세월이 지나도록 좀처럼 벗겨지지 않기에. 난 무엇을 바라고 수첩에 역사를 담아놓았을까 허무해지는 순간들을 그만 경험하고 싶어 아예 기록이란 것을 남기지 말 걸 그랬나 싶으나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켜켜이 쌓여 썩고 있는 부정의 감정들이 일소된다.
미안하고 또 사랑하고!
너라는 이정표로 내가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 힘들어하는 너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고만 있는 내가 한없이 무기력하고 헛살아 온 것 같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체되어 옴싹 달짝 못하고 있다니……
이런 순간이라 그때도 적어 놓았겠지. 그러면서 달랬겠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잊히고 무뎌지고 그랬을 거다.
작년 가을 도서관에 반납하러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데가 없어 두리번거리는데 어떤 시선이 나를 쫓는다. 나도 그쪽을 바라본다. 앗!
이게 얼마만인가! 벌써 10년도 더 훌쩍 흘러버린 세월.
평생 같이 즐길 것처럼 의지가 되어 똘똘 뭉치고,
밤새 즐기고 함께 웃었다. 싸울 것도 없고 다 그렇구나 하고 무한의 신뢰를 가져야 그처럼 5년을 단단히 뭉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도 각자 결혼을 하고도 첫아이 낳고 아장아장 걸을 때까지도 함께 지냈던 친구들!
나는 왜 그들과 연락도 않고 살아왔을까.
그는 중학생이 된 아이 도서관 봉사에 데리고 온 것이라 했다. 짧지만 반갑게 인사하고 그네들에게서 동떨어졌던 나는 다시 연락을 할 마음을 먹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며칠 후 한 두 명과 통화가 됐고 내게 전화를 해온 은희와는 벌써 두어 번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친구였던 그녀와는 연결되지 않았다. 내 가장 절친했던 세월의 벗들은 그저 수첩 속에 남긴 채 시골로 보내졌다.
어제 그간 병이 나 힘들었다던 은희를 만났다. 뭔가 위로와 격려를 주고 싶고 내게 몇 차례 연락을 준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일인지!
만나러 가는 길에 가을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새빨간 단풍에 짙노란 은행잎들이 노래라도 쑥쑥 빨아올려 뱉어질 듯!
멋진 가로수를 장식하고 있었다.
좀 쌀쌀하지만 파란 가을 하늘만 믿고
마음을 훌러덩 내밀다 그만
10년 전에 하지 못한 이야기가 세어 나오고 말았다.
묻어두고 싶었지만 살다 보니 어떤 것은 뱉어낼 필요도 있던 이야기, 어쩌면 일방의 진실일지 모르는 이야기들을 내뱉고
쪼잔해지는 느낌이 들긴 했어도 참 후련했다.
적어도 이 친구와는 10년은 더 가지 않을까~
이젠 아프다고 그냥 내미는 그런 시절은 지난 나이니까, 세월이 병도 주고 약도 주고 그랬으니 또 생채기가 나도
앞으로 더 얼마나 아프다 할까!
오히려 이젠 소중한 것은 그렇게 쉽게 뱉어내지 않아야 한다는 처방전도 각인되었으니 튼튼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