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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라 Oct 30. 2021

스우파와 페미니즘

잘봐, 언니들은 이제 시작이다.

  엠넷에서 방영한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대세다. 음악도 춤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방영 초반부터 관심 있게 보았다. 처음에는 흔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감동 포인트들과 기대치 않았던 페미니즘 요소들이 대놓고 녹아 있어서 기쁘게 보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역시나 스우파에 감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춤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감동을 받은 이들도 많았다. 왜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가? 그리고 나는 왜 히죽거리며 페미니즘이 녹여진 장면들을 보고 또 보는가?



 1. 약자를 전면에 내세우다.


#여성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슈퍼밴드 시즌 1'이 남성 참가자들만 모집했던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논란 때문인지 다행히 '슈퍼밴드 시즌 2'는 여성들도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 심사위원들의 숫자가 많았다. 이는 웬만한 프로그램에서도 그러하다. 참가자이든 패널이든 심사위원이든 대부분이 남성이고, 여성은 몇몇만 등장하여 분위기를 띄우고 애교를 발사하거나 보조를 하는 역할로 나올 때가 많다. 


  그러나 스우파는 여성들로만 시작하였다. 아마 혹시 시즌 2가 나오게 되면 스트릿 '맨' 파이터로 남성들만 참가할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프로그램의 대표 격인 시즌 1을 여성들로만 구성한 점이 좋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인 현실세계에서 남성들을 참가할 수 없게 하였다고 역차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다들 알고 계시겠지.



#댄서


  그리고 스우파는 댄서를 전면에 내세웠다. 방송 후반부 미션 중 유명 가수들이 노래만 부르고 무대는 댄서들이 채우는 미션이 있었다. 선미, 쌈디, 청하 등 쟁쟁한 가수들이 무대 변두리에 서서 백업 코러스처럼 노래만 불렀고 무대의 주인공은 댄서들이었다. 평소에는 가수가 중심에 서고 댄서들이 뒤에서 춤을 추었었는데 이것이 뒤집힌 것이다. 전복된 이미지가 주는 낯섦에 큰 쾌감이 있었다. 목소리가 없던 사람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지고 그 마이크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를 쩌렁쩌렁 울리며 할 말을 외치는 것 같았다. 백성이 임금을 몰아내고 하위계급이 기득권을 혁명으로 몰아낸 것처럼. 마치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야기 속 전복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 같은 믿기 힘든 기쁨.


2. 주눅 들지 않는 참가자들


  기존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가수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참가자들은 보통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이었고 심사위원들 앞에서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들이 나왔고 청소년들은 대기업 회장님들 앞에서 90도가 넘는 절을 매번 해가면서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고개에는 심사평에 공감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대기업 회장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 같은 느낌도 들었었다. 또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리거나 아직 경력을 쌓아보지 않은 아마추어들이었기 때문에 무대 완성도가 떨어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스우파는 달랐다. 댄스씬에서 오 년에서 십 년 정도 크고 작은 공연들을 하면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들이 참가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퍼포먼스 무대는 프로다웠다. 배틀을 할 때에도 배틀 결과를 받아들일 때에도 당당하였다. 


  다른 프로그램들에서는 주눅이 든 참가자들만 보다가 당당한 태도의 참가자들을 보니 더 기쁘고 기분 좋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주눅이 든 참가자들의 모습은 그들이 떨어지든 붙든 보는 내가 괜히 너무 안쓰럽고 미안해졌었기 때문이다.




3. 의상


#훅

  훅의 리더 아이키가 "너무 마르면 우리 팀에 들어올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실제로 훅의 의상들은 젠더 구별이 무의미한 통 큰 바지, 트레이닝복, 헐렁한 윗옷들이 많았다. 방송 중반에 야외수영장에서 풀파티를 하는 방송이 있었다. 다른 크루들은 모두 비키니를 입고 풀파티에 왔는데 훅 멤버들은 전원 구명조끼를 입고 파티에 왔다. 아이키가 풀파티 장소를 워터파크인 줄로 착각하고 비키니 대신 구명조끼를 입고 갔다는 말도 있던데 사실이 무엇이건 구명조끼와 비키니가 주는 대비 효과에 정말 탄성이 나왔다.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프라우드먼

  프라우드먼의 팀명도 '프라우드', '워먼'을 짐작케 한다. 실력 있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팀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는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 프라우드먼 역시 미션마다 최대한 통 큰 바지를 입거나 헐렁한 옷들을 자주 입었다. 또한 '맨 오브 프라우드먼' 미션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바꾸어 최대한 댄서들이 남성적으로 옷을 입고 '여성선언문'의 가사를 몸짓으로 정확히 드러내는 무대를 꾸몄다. 이 무대 또한 희열이었다.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노래 가사를 티브이에서 볼 수 있다니. 페미니즘 강의에서 수없이 쓰이게 될 명 무대였다고 생각한다.



4. 여성들이 중시하는 가치 - 자연스러운 화합과 연대


  나는 젠더로 무언가를 구별 짓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젠더별로 가지고 있는 문화나 특성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역사인지 본능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회적으로 쌓아온 '문화'라는 인류학적인 측면으로 초점을 맞춰보겠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모이면 보통 '말'로 상황을 풀어 나가는 문화가 그것이다. 갈등이 있거나 함께 무언가를 꾸며야 할 때 계속 말을 해 나간다.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한 명이라도 속상하거나 서운한 사람이 있는 것 같으면 말로 확인하고 다독이며 서운함이 해결이 된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표정을 살피거나 말을 잘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 중에도 욱하며 갈등 해결을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남성들 중에도 부드럽게 화합을 잘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다만 이는 다른 성보다 여성들이 있는 집단에서 특히 더 자주 보이는 문화라고 해두자. 


  스우파에서도 모든 여성들이 다 친밀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인간관계 논란이 있는 멤버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대에서 팀에 상관없이 서로 소리 질러주며 응원하고 박수를 쳐주는 장면들이 당연하게 반복되어 나왔다. 기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경쟁 팀이 공연을 하고 있을 때 경직된 자세로 바라보기만 하는 참가자들이 주로 나왔었던 것과 상반된다. 팀 구별이나 승패에 상관없이, 함께 댄스를 하는 사람들로서 무대를 같이 즐기는 모습. '무대를 찢었고',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난다고 상대 팀을 격하게 칭찬하는 사람들. 허니제이와 코카 앤 버터의 오랜 갈등 또한 먼저 손을 내밀고 포옹을 하는 용기와 화합. 스르르 녹는 감정들로 너도 나도 함께 눈물짓는 모습들이 스우파의 매력이었다.



5. 춤


  페미니즘적인 요소를 다 빼고 그냥 음악과 춤만 보더라도 너무 멋있다. 어쩌면 관절들이 저렇게 부드럽게 잘 움직일까. 그녀들의 단단한 허벅지 근육들을 보면서 평소에 얼마나 운동도, 춤 연습도 많이 할까 싶었다. 매번 멋진 프로의 무대들을 보여주는 그녀들. 십 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아마도 적은 돈을 받으며 열정 하나로 풍파를 견디며 살아왔을 그녀들. 그녀들의 견뎌옴 자체가 너무나 감동적이다. 견뎌온 사람들은 내공이 깊다. 그 깊은 내공이 퍼포먼스와 태도들에 모두 드러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이토록 대세인 프로그램이 되었나 보다.




  사실 난 엄청 내가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그냥 일반적이다. 당연히 보통 사람만의 선함이 있고 보통 사람만의 악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나예요.'라고 말하는 허니제이. 페미니즘도 인권도 성별에 상관없이 그냥 '나'임을 인정하자는 이야기인 거다. '여성이면서 왜 그래, 페미니스트라면서 왜 그래, 착한 사람이라면서 왜 그래.'가 아니다. 너, 나,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한 명 한 명의 '사람'이라는 말.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당당히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그녀들. "잘 봐, 언니들은 이제 시작이다."라는 그녀들의 외침을 격하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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