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것도 아닌, 뒤처진 것도 아닌, 선택권은 있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망한 적이 없다. 그런데 다음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공을 했냐고 물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성공을 한 적도 없다.
주체적인 성향이 강하고 공부도 일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공간을 다루며 설계하며 자연과 가까워지는 것이 좋았던 나는 내 전공인 조경이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했고(지금도 간혹 관련 아티클이나 잡지를 본다), 졸업 이후로 하고싶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씩 꽤 밀도있게 해봤다. 가구 세일즈(컨설팅, 온라인스토어 기획을 겸한), 인테리어 디자인, 공연 기획, 호주 워킹홀리데이, 바리스타 등을 거쳐 UIUX, 서비스기획, PO, PM이 되었다. 기획자로 지내는 7년 동안에도 나는 에이전시와 스타트업에서 금융, 헬스케어, F&B, IoT, 프롭테크 등의 다양한 도메인을 경험했다. 터무니없고 연결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게 내 경험의 패키지 구성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도 지난한 관찰을 통해 연결되는 구석을 잘 찾았고, 새로 배우는 일을 비교적 빨리 익혀 진정성 있게 내 일에 몰두하며 퍼포먼스를 내는데 노력했다. 정말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일’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때에 전직이나 이직을 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엄청 좋은 회사는 아니지만 커리어를 시작하기에 손색없는 회사들과 접점을 그리며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면서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양해지면서 더 다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 생각보다 겁이 난 적은 없었다. 대부분 다음에 무얼 할지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 한 상태에서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자신감이 있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재밌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 상태로 30대가 끝나는 시점까지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나씩 생각해 봤다. 난 왜 그렇게 바위 위를 뛰어다니는 개구리처럼 살았던 걸까?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아니었는데 억지로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막상 각기 다른 일을 할 때는 연결점을 잘 찾아왔는데 내 인생에 대한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걸까. 결론은 내가 ‘실패’를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실패를 피하는 필승법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내 노력과 경험들이 적당한 선에서 이루어진 타협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심지어는 직업을 수집하냐는 이야기까지 들어봤다. 내면을 들여다봤다. 나는 과연 저 경험과 일들을 진심으로 원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 일들을 ‘갖다’시피 하면서 막상 갖고 나니 만족하지 못할 수가 있나? 그러다 보니 ‘아, 내가 실패를 원치 않아서 실패할 일도 실패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실패할 확률이 높은데, 그것을 꾸역꾸역 골 안에 넣어서 어떻게든 득점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기 싫고 못하는 일 마저 잘하는 일로 둔갑해서 내가 마치 모든 걸 수용할 수 있는 사람처럼 커스터마이징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나를 괴롭히게 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서 온다는 생각도 못했다. 못하고 안해본 일도 잘할 수 있게 되면 그것 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으며, 그렇게 내 가치가 올라가고 사회에서도 나를 그만큼 인정해 줄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약속을 한 것 같았다. 이 약속을 언제까지 지켜야 할까? 이게 진짜 내 모습인가를 물어보기를 여러 번 지나쳐 왔기에 지금의 시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다행히도 요즘 시대에는 평생직장도 없고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직업을 바꾸는 것쯤은 이제 당연 해졌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선행 학습을 잘한 듯하다. 다만 점점 나이가 들 수록 두려움은 커지고 세상은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이전에 내가 좀 더 빨리 움직였지만, 지금은 ‘빠르게’만 움직일 뿐 ‘어디로’ 가는지는 고장 난 나침반을 들고 헤매는 것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다 싶으면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고, 이게 맞다 싶으면 만족할 때까지 계속했는데 지금은 멈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전례 없는 상태다. 지금 이 시기를 현명하게 보내지 않으면 더 크게 스텝이 꼬일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쉽게 잊히지 않고 잊어서도 안된다. 작은 실패들을 했지만, 큰 실패를 통해 내 그릇의 크기도 알게 될 것이고, 미래의 내가 그 실패들을 수습하면서 더 큰 사람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또는 스테이크 접시가 되고 싶었는데 라면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내 그릇을 재차 살펴보며 과감히 깨고 다시 빚어내야 한다. 다시 가마에 불을 올리고 새로운 반죽을 손에 쥐고 요리조리 굴려본다. 좋은 실패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