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잊기는 싫지만 현실에 다시 발 붙여야 할 때
다시 육지의 시간이 돌아왔다. 속이 메스껍고 어질어질하다. 제주에는 무엇이 있길래 며칠 제주의 공기를 마신 것만으로도 이렇게 시차 없는 시차 적응을 하게 하는 걸까? 아직 마음이 제주를 떠나오지 못해서 멀미가 난다.
돌아온 일상은 역시나 변한 게 없었다. 변한 게 있다면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은 나이다. 얼마 전 읽은 <월든>을 필사하려고 펴서 다시 조금 읽는데, 맙소사. 완전히 다른 책이 되어 있었다. 책을 보면서 적어둔 내 생각이나 해석을 다시 보니 이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싶다. 보아하니 월든도 최소 세 번은 읽어야 되겠구나 싶었다. 굉장히 이질감 있는 해석을 하며 내 마음대로 책을 읽고 있었구나.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지. 이 책을 읽었을 2025년 12월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또 한 번 멀미가 일었다. ‘아. 나 이때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여전히 고여있고 상해있었어.’
몇 가지 사례 중 '3D 극장에서 안경 없이 본걸까' 싶었던 글 중 하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p.19 - 경제
나는 우리가 지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염려를 포기하는 만큼 정말로 다른데 관심을 쏟을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강점만 아니라 약점과도 잘 어울린다. 어떤 것에 대해 끊임없이 느끼는 불안과 긴장은 치유 불능의 질병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당시 내 생각)“조금 혼란스러운 문장인데… 무얼 더 믿으라는 걸까? 안정감은 어디에서 찾고? 현대인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위 ‘돈’ 걱정 없이 다른 어디에 관심을 쏟을 수 있을까? 연결되지 않은 게 없는데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소로처럼 오두막을 지어 살고 물고기를 잡고 농작을 하며 살 수 없는데… 돈이 없이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느껴볼 자신이 없고 그런 방법이 현실에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왜 이 챕터 제목은 ‘경제’ 인거지? 마치 물 한 모금 편히 먹기 어려운 아스팔트 도시의 길고양이가 된 것 같다.”
이 때는 ‘경제’ 챕터에서 말하는 것이 경제활동을 하느라 또는 진짜 필요하거나 원치 않는 자원을 위해 노예가 되지 말라는 피상적인 뜻만 생각하며 읽었던 것 같다. 이제 필수재가 되어버린 것들마저 포기하고 도인처럼 살라는 말로 해석해 버렸다. 물론 시대적 배경인 1800년도인 만큼, 다른 이치와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속에서 ‘너무하네’라는 생각이 터져 나왔다. 고작 한 달도 안 된 기간 전의 나는 불순물이 섞이고 정화되지 않은 흙탕물 같은 흐릿한 시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읽는 지금의 시점으로 분명 이 글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 욕심이 과하면 그릇에 넘치는 물을 훔치느라 더 고생이니 과욕하지 말고 그 시간을 내가 하지 못한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쓰며 더 의미 있고 기쁘게 살아야 한다’라는 메시지로 명확히 다가왔다. 이 글을 쓰는 행위도 그런 소로의 말과 연결되듯이. 유난히 바보 같고 시야가 좁았던 한 달 전의 나는 어떤 상태였는지 다시 회고해 보았다. 다시 건강한 정신으로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변해온 내가 과거의 나와 멀미를 일으키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분명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울에선 하늘을 보려면 건물이 없는 곳까지 한참을 걸어 나가거나 넓은 차선으로 뚫린 길을 운전해야 한다. 종종 머리 위의 구름이 보이기는 하지만, 하늘과 맞닿은 구름의 하단은 도통 보기가 어렵다. 불쑥 내민 정수리만 보일 뿐이다. 생각보다 카스텔라처럼 구름의 하단은 매끈하고 부드럽게 연결되어 퐁실퐁실 떠 있는데, 그 모습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자꾸 제주의 하늘이 생각이 나나보다. 곧 과거의 나를 잘 당겨와 지금의 나를 물들여 멀미가 끝나겠지? 괜찮은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적응의 시간이 꽤나 의미 있게 느껴진다. 다음엔 제주의 다른 계절을 만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