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써먹기 위해’ 배운다
대학 다닐 때 배운 것 중 내 삶의 원칙이 된 개념이 있다. 디자인 이론에서 가장 기본 전제로 접했던 요소들이다. 디자인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에 가까웠다.
디자인 3요소
: 기능성, 심미성, 상징성
굿디자인 5요소
: 합목적성, 심미성, 독창성, 경제성, 질서성
이 중에서 생활 전반에 걸쳐 고려할 수 있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을 고르자면, ‘기능성(합목적성), 심미성, 경제성’이다. 특히나 이 기준은 소비를 할 때 가장 적용하기 좋다.
1. 기능에 충실한가?
2. 미적으로 충족되는가?
3. 가격이 합리적인가?
이 기준에서 보면 그냥 ‘마음에 들어서’ 사지 않고, ‘마음에 드는데 쓸모 있고 가격도 적당해서’ 산다. 가격이 조금 나가는 것들은 대부분 높은 심미적 기준을 충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때는 ‘기능’이 목적에 부합하는지가 중요하다(많은 기능보다, 필요한 기능을 잘 수행하는가).
‘이 예쁜 것을 이 가격을 주고 산다면 충분히 내 삶에서 유용하게 쓰이거나 나를 편리하게 해주는 물건인가?’
여기서 더 미니멀한 가치를 주고 싶다면 디터람스의 ‘좋은 디자인을 위한 10가지 원칙’을 참고해도 좋지만, 그가 남긴 유명한 말 ‘Less, but Better’라는 말 한 문장만 이해하더라도 미니멀한 가치를 얹을 수 있다. 더 적은 것으로 큰 가치나 효용(기능, 미, 경제 무엇이든)을 가져오는 선택을 하면 된다.
그래서 내 쇼핑은 꽤나 피곤하기도 하고, 어떨 땐 너무 명확해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빨리 결정되기도 한다. 고민될 때는 대부분 비슷한 범주에서 겹치는 아이템일 경우다. 물론 이렇게 기준을 두고 쇼핑을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템일 때 그렇다. 생각보다 쓸 일이 잘 생기지 않아서 서랍 속에서 자고 있거나, 유용할 것 같아 보였는데 막상 써보니 손에 안 붙어서 잘 안 쓰게 되는 것들이 보통 처음 그 카테고리의 물건을 사봤을 때 흔히 하게 되는 실수이다.
그래서 이제 어느 정도 ‘사는 것들만 사는’ 리스트들이 있다. 거의 구독을 해도 무방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사는 아이템들. 이제는 예전처럼 새로운 시도는 왠만해선 하지 않는다. 결국 편하고, 잘 맞고, 소재가 좋고, 여기저기 매치하기 편한 기본템이 아니면 손이 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취향은 확고해지고, 이제 잘 변하지 않는다. 호기심이 사라진 다기 보다, 10년 20년 주기로 돌고 도는 트렌드가 이제 ‘아는 버전의 업데이트’ 일 경우가 많아서 굳이 도전해 볼 필요가 없거나 ‘아는 맛’ 일 확률이 높아서 일거다.
이 세 가지 원칙은, 관계를 맺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적용 가능하다. 관계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무리하지 않고 부담 주지 않는’ 사람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었다. 다만, 일(업무) 자체에는 적용 가능했지만 ‘커리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나는 이 원칙을 자꾸 잊고 여유 없이 버티는 선택들을 했던 시기가 꽤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세 가지 요소는 항상 내가 ‘원점’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인생의 경력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년 전에 배운 디자인에 대한 원칙들이 불변히 작동하는 것을 보면 당대 디자이너들의 정수를 제대로 배운 것 같아서 학비가 아깝지 않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어떤 배움은 내 삶에서 핵심 가치가 되어 여러 영역에서 실천하고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귀한 원료가 된다.
최근 니체의 책들을 접하면서 내 것으로 소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건 디자인 원칙처럼 간결한 문장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다독하고 정리하고 새겨야겠지만, 대학을 다닐 때만큼 재미있게 공부 중이다. 하나의 개념이 내 삶에 들어오려면 연관 지을 수 있는 이벤트들이 쌓여야 결국 함축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설명 가능하게 된다.
지금 이 기간에 많은 시간을 내가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에 쓸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뒤늦게라도 삶에 새로운 축이 될만한 것들을 알게 되어 기쁘다. 여기서 더 확장될 나의 세계가 기대되고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