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나에게 주는 말
나는 종교가 없다. 다만, 어머니가 삼성역에 있는 봉은사를 열심히 다니시기에 이따금씩 절에 들르지만,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기에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가족이 절에 다니시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법구경이니 화엄경이니 하는) 경전을 접했을 법도한데 그에 대한 이해도는 전혀 없다.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를 따라서 교회를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다. 노래도 부르고 신나는 분위기가 특이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앉은자리에서 돌아가는 헌금함에 압박감을 느끼고, 무안함과 당혹감에 민망한 감정이 여전히 교회를 주저하게 되는 이상한 사유가 되었다. (특종 종교를 비난하려는 이야기를 하려는 챕터는 아니다.)
아마도 중학교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문구가 있어서 기록에 남겨두려 한다. 대략적인 문맥은 아래와 같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들은
신이 나에게 해주는 말과 같다.
따라서 귀 기울여 듣고,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더 나아지도록
몸과 마음을 단련하라.”
책이었는지 교회나 절에서 들은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에 남지 않지만, 그 말을 여전히 잘 지키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나의 주관을 반영해서 먼저 해석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무척이나 좋은 습관이었던 것 같다.
이는 머리가 제법 굳어가는 40대에 더 유용한 것 같다. 이따금씩 의논을 하게 되는 자리에서 나만의 해석을 먼저 하려는 모습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동안 쌓아왔던 회사 직무 경험의 관점에서 회의나 토의에 임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본인이 믿고, 듣고 싶은 대로만 살아간다고 한다. 경험한 것이 전체 세계라고 착각하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신경 쓰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앞으로도 더 유지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 메모를 하거나 좋은 내용이 있으면 기억해 두었다가 개인적인 발전에 유용했다. 이런 습관은 청소년기 때부터 주변에 좋은 사람과 친구들의 장점을 모두 흡수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런 습관에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도 있었다.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는 다른 사람의 말과 그에 따른 말투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예민하게 느끼고 장점을 캐치하려는 감각이 훈련됨과 동시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만의 나름대로 해석을 하려는 과정에서 비꼬아 해석을 하는 부작용이 생긴 듯하다. 좋은 습관에 대한 심각한 반작용이 생긴 셈이다.
사춘기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러한 행동과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내적으로 나를 성숙하게 해 준 것 같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그려지는 일련의 과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의 섀도잉과정이 나에게는 최종적으로 한 문장, 한 단어로 표현하는 요약 능력을 연마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산문을 한 두장 짜리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과정에서 나온 선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