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영어를 정복해보겠다고 큰 마음먹고 종로 학원에 거금을 투자했다. 영문학도가 영어도 못하는 게 창피했고 좋아하니까 잘해보고 싶은 욕심이 나를 학원으로 이끌었다. 의지를 다지고 친구와 함께 한 첫 토익 강의실은 발 디딜 틈이 없어 꽉 찼다. 한양대 영문과를 나오셨다는 선생님께서는 대뜸 이런 조언을 날렸다.
"여러분 영어 잘한다는 게 뭡니까? 토익 900? 그럼 어디 가서 나 토익 900이야. 영어 잘해. 문제 한 번 가져와봐. 이렇게 하면 누가 영어 잘한다고 알아줍니까?"
토익은 여기서 바짝 끝내고 뭐라도 앞에서 씨부릴 줄 알아야 영어 잘한다는 소리 들으니 보여줄 수 있는 회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조언이었다. 예시가 재밌었는지 수강생은 일제히 깔깔 웃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토익이 만점이어도 스피킹을 못하는 가짜 영잘러가 화두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 쓸데가 없는 토익 수업은 안 그래도 지루한데 더 지루하게 느껴졌고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회화에 집중하기로 하고 토익 수업을 환불했다. 토익은 아무래도 취업이나 졸업으로 필요할 때 만들면 되는 점수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영어회화 수업이 재밌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왕초보 영어 수업은 굉장히 창피하고 굉장히 지루했다. 내가 꿈꾸던 외국인 선생님과의 수업은 나의 영어 레벨이 초라해서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왕초보 수업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과 짝을 지어주고 비슷한 패턴의 문장을 연기하며 연습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역시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수업이었다. 안 그래도 낯을 가리는 성격에 처음 보는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건 끔찍했다. 서로가 엉망인데 서로가 어떻게든 입을 떼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안쓰러웠다. 이렇게 해서는 영어가 절대 늘 것 같지 않았고 곧장 영어회화 수업도 환불했다. 영어를 정복하겠다는 1학년 여름방학의 목표는 너무 빨리 사라졌다. 목표는 그대로였으나 나에게 맞는 수단을 찾아내는 게 어려웠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때 이후로 여전히 영어 공부법을 찾아 헤매는 유목민 신세다. 효과적이라 꼽히는 공부법은 다 경험해봤다. 이미 밝혔듯이 학원의 도움을 시작으로 1:1 언어 교환 모임, 전화영어, 영어일기, 프렌즈 섀도잉 등등. 아마도 대부분의 학습자가 '영어공부법'을 찾고 또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을 찾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효과적인 영어 공부법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공부법을 찾는 과정으로는 절대 영어를 익힐 수 없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영어를 학습하는데 마법 같은 지름길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좋은 공부법이라고 한들 나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나는 영어 일기 쓰는 게 유난히 맞지 않았다. 영작이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으로 영어 문장을 만들다보니 매일 쓰는 문장이 거기서 거기였다. 한마디로 노잼이었다. 맞지 않는 영어일기는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은 죄다 영어일기를 추천하는데 내가 이걸 포기하면 나는 절대 영잘러가 될 수 없나?' 한때는 이런 생각으로 지루한 공부도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무슨 공부법이든 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공부법이다.
결국,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얼마만큼 영어공부로 시행착오를 많이 겪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 자신에게 맞는 공부법을 잘 찾았는지와 같다. 다행인 것은 더 이상 지루하고 재미없는 토익이나 교과서 지문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내가 흥미를 느낄만한 영어 자료로 원하는 만큼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영어 공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동력이다. 재미없는 자료를 던져주고 숙제를 해오라고 다그치는 선생님도 없다. 이제는 내가 재미있는 자료를 직접 골라 공부하고 스스로 과제를 내준다. 끊임없이 다그치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영어 정복에도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