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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Sep 28. 2022

결국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유난히 가라앉아 공허한 날이었다. 안 좋은 에너지가 자꾸 나를 향할 때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런 기분은 수다로 날리는 편이라 마침 대화중이던 채팅방에 나의 공허함과 울적함을 털어놨다. 실체가 없다고 믿고 싶었지만 알고 보면 실체가 있었던 그 마음은 내 입을 타고 밖으로 꺼내어진 순간 아주 조금은 괜찮아졌다. 이미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반쯤 덜어진 울적함은 연이어 털어놓은 친구들의 불행에 덮여 덜어진 반에서 그 반만큼 더 작아졌다.


친구 A는 다짜고짜 내일 죽기보다 가기 싫은 워크숍이 있어서 소름 끼치도록 괴롭다고 말했다. 어쩐지 그 기분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내일 소름 끼치는 워크숍이 없는 내 현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심이 됐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안도감이 노골적이라서 친구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구린 기분은 워크숍 앞에서 조금 경건해졌달까. 나 역시 워크숍 따위의 사회생활을 소름 끼치게 싫어하는 친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름 끼친다고 한 그녀의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고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에, 내일 워크숍 안 가도 되니까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고 작게 혼잣말로 친구에게 미안함을 말했다.


그러자 친구 B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며 A의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금세 말을 바꾸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코로나 양성보다는 음성으로 삶을 사는 게 낫다고 했다. 하필 B는 코로나 확진 이틀 차로 어지럼과 목 통증이 끊이지 않아 온 몸으로 코로나와 싸우는 중이었다. 건강이 악화되면 아프지 않은 몸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진다는 것을, 간간히 아픈 몸을 겪으며 살아온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장 본인의 몸을 컨트롤하기도 힘들었던 B에게는 컨디션만 정상으로 만들어준다면 워크숍 따위 두 번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내일 죽기보다 가기 싫은 워크숍도 없고 코로나 양성도 아닌 그저 기분만 살짝 구렸던 나의 하루는 어느새 불행을 논하기에는 너무 괜찮은 보통날이 됐다.

나는 오늘 울적해. 나는 내일 워크숍이 죽기보다 가기 싫어. 차라리 코로나 안 걸리고 워크숍 가는 게 낫지. 우리의 대화는 다소 생뚱맞게 흘렀지만 이상한 흐름이라 오히려 웃기기까지 했다. 인간은 모두 저마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매일을 사는데 그깟 기분 조금 구린 게 뭐 대수냐. 그런 생각이 옅게 깔렸던 것 같다.


불행의 크기를 재고 비교하며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다' 우월감에서 오는 안도는 결코 아니었다. 사람 사는 건 이렇게 다양하고 누구든 조금씩은 귀찮고 짜증 나는 일 투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니 거기에서 밀려오는 안도감 같은 거였다. 행복이란 참으로 별거 없구나 싶을 때 차오르는 감정과도 비슷한 마음. 우리가 관계를 맺으면 서로의 행복과 불행도 자연스레 뒤섞여 보이지 않는 선이 서로를 이어주는 것 같다. 어떨 때는 사람이 너무 싫어서 무인도에 떨어지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타인은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가 있는데 그날이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던 정세랑 작가의 글이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며칠간은 얕게 울적함을 띄고 있었지만 그날의 대화가 나의 울적함을 더 빨리 희석시켜준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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