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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Oct 17. 2022

K-재수생으로 살아봤다면

열정! 뭐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되잖아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세뇌를 받았지만 내 소원은 결코 통일 같은 게 아니었다. 부지런히 소원한 것은 서울로 이사 가서 우리 가족이 함께 서울에서 사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아빠 왜 우리 집은 서울이 아니야? 왜 나를 서울에서 안 낳았어?" 불만을 토로하며 아빠를 괴롭혔다. 열심히 졸라봐도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눈 감고 마음을 다해 빌어봤지만, 산타할아버지조차 내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정규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드디어 동경해 마지않던 서울에 살게 된다. 절망스럽게도 재수생의 신분으로 첫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가뜩이나 길지도 않은 팔을 다 뻗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았던 고시원의 방 한 칸이 서울 생활의 시작이었다. 짐이라고 들어갈 자리도 마땅치 않던 귀엽고 깜찍한 방에 겨우 둥지를 틀던 날, 멀리서 서울까지 딸내미를 고이 모셔주러 온 엄마 아빠와도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잘하고 있으라며 나를 응원하고 다독이던 부모님을 배웅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시점으로 그때의 나를 바라보니 짠하고 안쓰럽지만, 당시에는 무슨 열정이었는지 의지를 불태우며 열공에 힘썼다.


학원으로 등원한 첫날 조금은 부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배정된 반으로 들어가 내 자리를 맡았다.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던 재수생에게는 첫날부터 빡빡한 일정이 주어졌지만 쏙쏙 알아들을 수 있는 재밌는 수업이라 짜릿한 감동이었다. 등원 첫날의 또렷한 다른 기억은 지하 1층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던 점심시간의 차가운 공기다. 3월 새 학기마다 느꼈던 낯설고 차가운 분위기가 유독 짙었기 때문이다. 함께 점심 먹고 기댈 수 있는 친구를 탐색하는 일은 재수학원이라고 다르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점심을 먹는 친구 무리가 생겼다. 힘든 시절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머리가 자랄 대로 자란 다 큰 성인들이 모였음에도 자발적으로 감옥생활을 자처하고 알아서 절제하는 현실은 새삼 놀라웠다. 학원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허락 없이 나가면 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함부로 외출을 꿈꾸지 않았다. 어느 날 감기 기운이 느껴져 아무래도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친구도 아픈 것 같다고 하여 함께 조퇴증을 끊으러 갔다. 담임선생님께 우리는 정말로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이고 꾀병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받아 든 약 2시간 정도의 외출권. 그 작은 종이 쪼가리를 손에 쥐어야만 학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길임에도 순간적으로 아픔을 잊게 했던 노량진 골목의 햇빛을 기억한다. 너무나도 따사로웠기 때문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등원하여 해가 다 지고 나서야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일상에서 햇빛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햇살은 이전에도 수없이 나에게 내리쬐었을 텐데 온몸으로 햇살을 인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픈 것도 잊고 신이 나서 거리를 활보했고 평생 햇빛은 구경도 못 해본 사람들처럼 “야, 사람들은 이 시간에 햇빛을 받으면서 거리를 걸어 다니는 거야?” 대낮에 학원에 갇혀있는 처지를 같이 슬퍼하기도 했다.


어느 날 은행에서 볼 일이 생겨 밥을 일찍 먹고 짬을 내서 학원 건물 1층에 있는 하나은행에 갔다. 순서를 기다리다 집어 든 잡지를 휙휙 넘기다 보니 봄맞이 패션에 대한 기사와 함께 예쁜 옷들이 실려있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도 내년에 대학생이 된다면 이렇게 예쁜 옷을 마음껏 입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왔다. 예쁨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고 편하기만 한 운동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과 잡지 속 어여쁜 옷들이 대비되어 씁쓸한 마음이 몰려왔다. 가만 보면 지금까지도 멈출 수 없는 옷을 향한 관심은 그때의 억압에서 피어난 것 같기도 하다.


절제하는 삶 속에서도 몇 번의 일탈은 있었다. 모의고사를 보는 날은 학원 수업이 없어 대부분은 술과 함께 자유시간을 즐겼는데 우리는 언제나 저녁을 먹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학습한다는 이름만 붙었을 뿐 언제나 강제였던 자율학습을 글자 그대로 해낸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나의 무리 속 친구 한 명이 우리도 오늘만큼은 하루를 날리자면서 심야 영화를 제안했다. 왠지 내키지 않아 오래 고민했는데 하루 정도 일탈하는 것은 공부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말에 넘어가 늦은 밤 함께 택시를 타고 용산 cgv로 향했다. 꿈꾸던 서울에 와서도 서울을 느낄 새 없이 노량진 바닥이 서울의 전부였는데 야심한 시각에 서울의 밤을 가로지르니 정말로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그렇게 소원하던 서울이라는 도시는 밤이 이렇게나 멋지구나 싶어서 진심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고 밤바람을 고스란히 느낄 때 나는 직감했다. 앞으로도 나는 서울의 밤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비교적 작은 일탈은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포장마차에 들러 야식으로 잔치국수를 먹는 일 따위였다. 그때 포장마차에서 파는 잔치국수는 먹어도 먹어도 계속 생각날 만큼 맛있었다. 내가 노량진에 사는 동안에는 제발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만큼. 간혹 특강으로 수업이 축소된 주말에는 밖에서 점심을 먹고 학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앞에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을 꼭 들렀다. 생크림을 잔뜩 올린 아이스초코를 한 잔 들고 가면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지면서 위안이 되었다. 그 시절의 핫식스였다.

고시원에 살던 나와는 달리 한 살 터울 친언니와 함께 흑석동 옥탑방에서 자취하던 친구 집에도 가끔 놀러 갔다. 답답한 고시원에 사는 나를 잠시라도 구원하고자 초대해주었고, 뜨거운 여름날에 셋이서 나란히 누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던 밤은 외롭지 않고 포근했다.


인간이라는 종자가 원래 그렇다. 뭐든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듯이 자유를 박탈당하고 끊임없는 절제가 동반되니 작은 자유도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대낮에 다시 노량진 거리를 걸어도 햇빛은 그때의 것이 아니고, 오늘 심야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의 바람도 그때의 바람은 아니다. 장인이 만든 잔치국수를 가져와도 그때보다 맛있게 먹진 못할 것 같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때의 기억이 계속 선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목표를 위해 치열하게 나를 던져본 일은 그때가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전혀 없다는 사실은 행복일지 불행일지 대답하기 어렵다. 나 역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런 날이 또 왔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답도 선뜻 나오지 않는다. 열정으로 불타올라 매 순간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삶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나를 갉아먹는 열정과 열망은 이미 생각만으로도 뜨거워 데일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애틋해서 잘되고 싶지만, 그보다 오늘 먹는 점심 한 끼의 행복을 오롯이 느끼는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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