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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Aug 22. 2022

크로아티아에서 인생 첫 소매치기를 당했다

이승기가 저주받은 팽이를 돌리며 어설픈 짐꾼으로 활약했던 ‘꽃보다 누나’ 방영 후 크로아티아가 인기 여행지로 부상했다. 그 후 크로아티아로 여행 가는 한국인이 꽤 늘었는데 그 많은 한국인에 나와 친구도 이름을 올렸다. 2주간의 일정을 오직 크로아티아에 할애했고 비행기 티켓 예약을 시작으로 틈날 때마다 스터디 카페에서 만나 계획을 짰다. 시험공부하듯이 열심히 토론하며 일정을 예약했고 이렇게까지 꼼꼼한 여행 준비는 처음이라 떠나는 마음이 더욱 설렜다. 파란색 예쁜 표지의 여행 책도 한 권씩 사서 나란히 앉아 비행기에서 공부까지 잊지 않는 센스. 아주 완벽한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왔다.

 

직항이 없었던 터라 하루를 터키에서 머물고 자그레브로 건너갔는데 그제야 본격적인 여행 시작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자그레브는 플리트비체를 가기 전 거치는 환승지라 둘러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2-3시간 정도 비어있는 시간을 버리기는 아까워 중앙 광장이라도 보자며 후다닥 트램을 탔다. 트램은 만원이었다. 역시 크로아티아도 수도는 사람이 많구나. 한국의 지옥철을 경험했다면 이 정도쯤은 훗, 별것도 아니었다. 요리조리 사람들 틈에 끼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가죽재킷을 입고 빛나는 금발을 당차게 묶은 현지인이 유난히 나를 밀어댔다. 이렇게 사람 많은 트램에서 서로를 밀치는 일쯤이야 넓은 관용으로 이해해줘야지 별 수 있나. 나를 밀치는 그녀에게 ‘sorry’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주었다. 정신없는 만원 트램은 하차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숨을 토하며 땅을 밟는 순간 우리는 힘들다고 말했지만 이내 이것 또한 여행의 묘미라며 깔깔 웃었다.

 

그런데 내 가방이 원래 이렇게 열려있었나? 아까 분명히 잠갔는데 왜 열려있지? 조금 이상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대수롭지 않게 가방을 다시 잠그고 인생 샷 스팟을 물색했다. 그리곤 사진을 찍으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수사 중에 증거를 찾은 형사처럼 유난히 날 밀치던 현지인과 내리자마자 열려있던 가방이 유레카처럼 머리 위로 번쩍하더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제야 트램에서 소매치기 당한 것을 깨달았고 모든 정황이 단숨에 이해가 됐다. 상황이 정리되니 휴대폰을 훔쳐간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구의 전화를 빌려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예상대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 망할기지배야 휴대폰은 너 가지더라도 내 사진이라도 돌려주라고!!! 허탈했지만 나 때문에 여행을 망칠 수는 없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여행을 이어갔다. 빵을 사 먹으면서도 하필 맛없는 빵을 고른 건지 이 나라는 빵도 맛없다고 툴툴대며 그게 또 어이가 없어서 함께 웃었다. 몇 시간 후 플리트비체 숙소에 도착해서 찬찬히 짐을 풀었다. 웬만한 식당은 다 문을 닫아서 챙겨 온 컵라면으로 상을 차리는데 지갑을 찾던 친구가 심각해졌다. 자신의 정신머리를 탓하며 짐을 열심히 뒤지고 또 뒤져봐도 지갑을 못 찾겠다는 것이다. 분명 여기에 둔 것 같은데 없고 저기인가 싶어서 저기를 뒤져봐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순수하고 편견도 없었기에 그때까지도 의심하지 못했다. 내가 휴대폰을 잃었을 때 친구의 지갑도 함께 소매치기당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시간차를 두고서야 알게 됐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저녁이 완성인데 미처 저녁도 먹지 못하며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이 낫냐, 지갑을 잃어버리는 것이 낫냐. 누가 더 최악인지 배틀하며 우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갑자기 이 먼 타국까지 날아와서 받은 결과가 이런 것이라 생각하니 서러움이 폭발했고 친구는 이 나라가 싫어진다며 당장 내일 비행기가 있으면 이대로 한국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신세한탄을 하다 보니 이와중에 또 배는 고파져서 라면에 뜨거운물을 부었다. 나무젓가락은 한 개밖에 없어서 반으로 쪼개서 짧디 짧은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다보니 뭐하나 되는 일이 없구나 싶었고 남은 2주동안 어떻게 여행을 할지 까마득했다. 여행 경험이 좀 더 많았던 나는 지나고 나면 이런 순간들이 재밌는 에피소드로 기억될 거라고 친구를 위로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기분을 더 걱정하며 캄캄한 밤 지친 마음으로 잠들었다. 이미 여행은 망한 것 같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자비가 없다. 우리가 우울해도 여지없이 아침은 밝았고 당장 돌아갈 비행기 티켓도 없으니 별 수 없이 여행을 해야겠지 싶어 조식을 먹으러 나섰다. 힘이 쭉 빠진 채로 나갔는데 로비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예쁜 것 아닌가. 암흑으로 가득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아 너무 예쁘다’ 하며 감탄했다. 소매치기는 소매치기고 예쁜 건 예쁜 거다.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졌고 안 되겠다 싶어서 창문을 열고 사진까지 찍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믿기 어려웠지만 또 다른 자아가 등장한 건지 금세 다시 방방 뛰고 깔깔 웃었다. 숙소 풍경이 이 정도인데 플리트비체는 얼마나 더 예쁠지 기대가 되었다. 예상대로 플리트비체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예쁜 풍경 앞에서 전날 밤 암울했던 기분은 싹 다 날아갔다.

이렇게 예쁜데 별 수 있나. 다시 웃어야지.


나도 몰랐던 여러 가지 자아를 불쑥불쑥 만나는 일이 여행일까. 여행지에서는 큰 일도 큰일이 아닌 게 되고 복잡한 문제도 단순해지곤 한다. 몇 번을 여행해도 몇 번이든 다 그랬다. 놀랍게도 순간에만 집중하게 되는 에너지는 여행지에서 자주 나타난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당장 눈앞에 닥친 일 외에는 중요한 일이 없다. 친구와 크로아티아를 다녀온 지도 5년이 훌쩍 넘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2주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어디 가지 않고 내 안에 남아있다. 우리가 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친구는 나의 말이 진짜더라고 말한다. 지나고보니 가장 최악이던 기억이 가장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되었다고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미화되는 게 추억이라지만 여행지에서의 추억만큼은 보다 더 그렇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두 차곡차곡 모으면 '좋은'과 '나쁜'은 사라지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렇게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을 모으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여행은 언제든 하나씩 꺼내서 그리워할 수 있는 추억상자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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