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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Jan 13. 2023

4년에 한 번 출몰하는 '축구덕후' 라는 자아

축구의 치읓도 모르고 일말의 관심도 없으니 경기 규칙은 당연히 모른다. 언젠가는 골을 넣고도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취소되는 것을 보고 대체 뭐가 문제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니 오프사이드가 뭔데?" 설명을 들어도 아리송해서 여전히 알 길이 없다. '저건 오프사이드 아닌 거 같은데?' 하면 맞다고 하고, '저건 오프사이드 같은데?' 하면 아니라는 데 이해될 리가 있나. 아무리 축구를 모르고 관심이 없대도 월드컵 시즌은 특별하다. 들뜬 분위기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월드컵 축구는 정말이지 꿀잼이다. 대한민국 경기는 기본이고 빅매치로 불리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8강 경기도 빼놓지 않았다. 거기에 대망의 결승전까지 지켜본 후 빅재미를 놓치지 않은 나를 칭찬했고 메시가 축구로는 모든 것을 이뤘다는 사실까지 배웠다.


대한민국의 첫 경기를 앞두고 조금 당황했던 것은 손흥민 선수 말고는 모두가 초면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박지성은 해설한다고 치지만 기성용이랑 구자철은 어디 간 거야? 내가 아는 축구 선수들 전부 다 어디 간 거지? 새삼 낯익은 선수가 없으니 흥미가 조금 떨어졌지만, 이번 지나면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거를 수는 없지. 큰 기대는 없었지만 응원하며 경기를 지켜봤다.


역시 박지성도 없고 기성용도 없으니까 경기력이 영 부족하네. 믿을 건 손흥민 선수인데 내가 목격한 손흥민 선수의 경기력은 진정한 월드클래스가 맞는지 가끔 의아할 때가 있다. 국가대표로 뛰는 모습만 봤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슈퍼스타의 명성이 왜 국대에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 한마디 했더니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반론. "손흥민은 부인할 수 없는 월클이야" 솔직히 눈 뒤집히게 잘한다는 건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경기를 본다. 첫 경기인데 도무지 희망적이지 않다. "하... 이번엔 16강 못 가겠네" 또다시 들려오는 한 마디. "원래 우리나라 2002년 빼면 16강 진출 한 번밖에 못 했어." 그 많은 월드컵을 챙겨봤는데도 몰랐던 사실이다. 16강 진출이 한 3번 이상은 되는 줄 알았건만, 아니라니 충격이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경기는 영 재미가 없어서 그만 볼까 하다가 의리는 지켜야겠기에 다시 집중해본다.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경기 중에 선수 교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강인. 들어오자마자 날리는 저 윙크, 뭔데? 이 녀석. 꽤 귀엽군. 날쌘돌이처럼 축구도 너무 잘하는걸? 네이버 검색창에 바로 그의 이름을 입력해본다. 세상에나, 강인이 녀석은 무려 2001년생이다. 내가 2002년 월드컵을 보며 흥분하고 소리 지르던 그때 아장아장 걷는 것도 힘겨운 아기였다니. 2001년에 태어났음에도 누나의 마음을 흔들다니, 넌 유죄다. 어휴, 정신 차려. 몇 살 차이가 나는 거야.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가나다. 그나마 이길 확률이 높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우루과이전보다 안 좋다. 역시 16강은 무리인가 싶지만 남은 경기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각종 뉴스와 유튜브 채널에서는 16강 진출 경우의 수를 앞다투어 설명한다. 가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데자뷔 아냐? 생각해보니 월드컵마다 경우의 수 분석하는 걸 봤던 기억이 난다. 축구 강국은 앞선 두 번의 조별리그로 이미 16강을 확정 짓기도 하던데, 우리나라는 매번 경우의 수를 따져댔던 것 같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앞다투어 분석한다. 전 국민 몰래카메라 같은 기분이 들지만 '어차피 16강 힘들어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희망찬 분위기도 이해가 된다.


비록 낮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마지막 경기 상대는 포르투갈이다. "야 근데 쟤 호날두 같은데, 내가 아는 그 호날두 맞지? 호날두 되게 잘하는 애 아냐?" 축구를 아무리 몰라도 호날두와 메시정도는 아는데, 그중 한 명이 속한 국가와의 매치라니! 남들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나는 방금 알았다. 16강은 어차피 힘들겠다 싶어서 힘이 좀 빠졌는데 이번에야말로 의리로 봐야 하는 마지막 경기다. 지더라도 처참하게 무너지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경기를 지켜보는데 날고 기는 호날두의 모습이 영 보이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 호날두가 우리를 도와주고 있잖아!' 중간에 그를 뺀 포르투갈 감독에게 야유를 보내고 싶은 정도였다. '오늘 호날두 완전 우리편인데 빼면 어떡해요!'


우리나라의 선수교체도 빠지지 않았다. 방금 들어온 선수의 이름이 낯이 익다. 어? 황희찬? 저 얼굴을 내가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바로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선수였다. 몇 달 전 나 혼자 산다에 등장한 황희찬을 보고 나는 조금 실망을 했었다. 아, 오늘 재미없겠네. 바로 그 순간 친구의 카톡이 도착한다. "나혼산 기대했는데... 오늘 축구 선수 나오네. ㅠㅠ" 축구에 관심이 없으니 축구선수에게도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그런데 그때 실망을 안겨준 그 선수를 축구 경기에서 보니까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 마냥 반갑다. 저 황희찬이 그때 그 황희찬이구나.


"아니 희찬이는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 나온 거야?" 그는 줄곧 벤치에 있었다고 한다. 들어올 때의 느낌부터 남다르더니 처음 나온 경기에서 멋지고 시원하게 골을 넣어주었다. 감독님은 이렇게 잘하는 선수를 왜 그동안 숨겨두고 선발로 내보내지 않았는지 원망이 들려고 한다. 이 녀석!! 너도 정말 멋지구나. 이번에는 황희찬을 검색해본다. 그의 출생 연도는 1996년이다. 그래도 강인 이보다는 형이지만 희찬이 역시 한참 어리고 말았다. 괜히 기분이 별로다.


어느덧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다. 아무런 기대 없이 반은 포기하고 지켜본 게 사실이다. 그런데 웬걸? 신기하게도 딱 하나의 경우의 수에 들어맞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게 되네? 싶어서 신기하던 찰나 아직 좋아하긴 이르다고 한다. 동시에 진행되는 우루과이 vs 가나의 경기가 끝나지 않았고 그 경기 결과에 따라 16강 진출 여부가 결정된다. 남은 경기 시간은 8분. 마음을 졸이며 마치 가나 국민인냥 빙의하여 가나를 열렬히 응원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경기 못지않게 간절함을 담아 응원했는데 그 염원이 통한 것일까. 마지막까지 가나 선수들이 힘을 내준 덕에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은 성공하게 됐다. 사실상 기대한 사람보다 포기한 사람이 더 많은 경기였음에도 혹시 몰라서 시청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어차피 16강을 가도 다음 상대는 브라질이라고 일찌감치 포기하던 사람들! 봤냐? 봤냐고!!


종국엔 16강전에서 만난 브라질과의 대결에서 탈락이라는 결과를 맞았지만 16강전 경기 역시 놓치지 않길 다행이다 생각할 만큼 즐거웠다. 브라질을 이기고 8강을 간다는 건 애초에 희박한 확률이었기 때문에 편하게 시청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답답했던 전반전 경기가 끝나고 후반전에서 나아진 경기력을 보니 조금 아쉬움은 남았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새벽 4시에도 경기를 챙겨보는 '가짜 축덕'의 자아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유일한 시기. 이제 4년 동안 얌전히 숨어있다가 2026년에나 튀어나올 예정이다. 앞으로 4년 동안 좋은 일로 꽉꽉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2026년을 기다려본다. 아직 멀었네. 그 시간이면 뭐라도 충분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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