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도 유행이 있습니다.
요샌 ADHD가 한창이죠.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저도 ADHD 약을 복용 중입니다.
우울증으로 수면제를 먹기 시작한 건 5년쯤 됐습니다.
트렌드는 몰라도 유행병은 꼭 걸립니다.
코로나만 빼고요.
어쨌거나 ADHD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제가 한참 모자란 인간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이 크게 바뀐 건 아니지만 적어도 변명은, 아니 병명은 생겼습니다.
그냥 한 생각은 아니고요, 여행 갔을 때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의 일입니다.
저는 대체로 혼자 떠나는데, 혼자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게스트하우스나 체인 호텔도 안 갑니다.
한국인 많은 곳은 얼씬도 안 합니다.
별로 한국인처럼 안 보이는 모양인지 국적기를 타고 귀국할 때도 한국 승무원이
영어로 된 입국신고서를 줍니다. 질문도 영어로 합니다.
승무원 장단에 맞춰 저도 영어로 답합니다.
영어, 잘 못합니다. 그냥 뻔뻔하게 합니다.
보라카이에 갔을 때였습니다.
방갈로를 빌렸는데 저렴한 가격에 주방과 거실, 침실이 딸린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침에는 조식도 주고요.
추천하고 싶지만 기억력이 엉망인 데다 사진도 전혀 찍지 않아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어쨌든 느지막이 일어나 무슨 해변에 있는 유명한 망고주스를 먹으러 갔습니다.
동남아 이동 수단은 아시다시피 툭툭이죠.
한적한 해변가를 꽤 오래 달렸습니다.
툭툭이에서 내려 망고주스 가게에 들어가니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이 우글우글했습니다.
저도 자리를 잡고 망고주스를 시켰습니다.
주문하자마자 돈을 내라고 하더군요. 다행이었습니다.
왜냐면 지갑이 없었기 때문이죠. 주스가 나온 후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누가 봐도 지갑 잃어버린 관광객처럼 가방을 한참 뒤집고 소란을 피운 후에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망연하게 길을 걸었습니다.
하필이면 핸드폰도 방전되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습니다.
돈도, 핸드폰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길거리를 걷는 여행자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렇게 걷고 있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멈춰 섰습니다.
툭툭이 기사였죠. 저는 돈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설명했죠.
저는 관광지를 좋아합니다.
현지인 누구나 관광객에게 친절하기 때문이죠.
친절한 툭툭이 기사는 저를 근처 경찰서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돈도 받지 않고요.
경찰에게 툭툭이에 지갑을 놓고 내렸다고 말하니
저에게 종이를 한 장 주었습니다.
툭툭이 기사 얼굴을 그려 보라고요.
농담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눈코입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그리고, 손목시계를 그렸습니다.
보라카이 툭툭이 기사 아무나 데려와도 상관없는 초상화였습니다.
우주는 관대합니다.
이토록 모자란 인간에게는 아주 작은 운도 같이 줍니다.
숙소로 돌아갈 수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경찰이 지갑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근처 경찰서에 툭툭이 기사가 지갑을 맡겨두고 갔다면서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경찰 오토바이에 타고 다른 초소로 가서
지갑을 받았습니다.
현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툭툭이 기사에게 사례하고 싶었지만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네, 망고주스를 먹으러 가야죠.
툭툭이를 타고 다시 망고주스 가게로 갔습니다.
가게 주인이 저를 기억하더군요.
지갑을 찾았냐고 물어서 자신 있게 망고주스를 주문했습니다.
너무 달아서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마시고 나오는데, 뒤에서 가게 주인이 큰 소리로 저를 부르면서
쫓아왔습니다.
아, 이번엔 망고주스 가게에 지갑을 두고 나온 겁니다.
가게 주인은 돌아서며 필리핀 말로 끊임없이 투덜거렸는데
'어디서 이렇게 모자란...' 이런 말이었겠지요.
들어도 쌉니다.
그 이후로도 잃어버린 지갑이 돌아오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운이 좋은 것 아니냐고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주 잃어버리지도 않을 겁니다.
심지어 집에서 잃어버리고 못 찾는 물건도 수두룩합니다.
ADHD를 모욕한 고백이 되었을까 봐 걱정입니다.
모든 ADHD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