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제텔카스텐보다 오리지널이 나은 점.
앞서 고양이와 함께 하는 제텔카스텐에서 이야기했듯,
니클라스 루만의 오리지널 제텔카스텐은 내가 서랍 구조라고 부르는 열린 선형 구조를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폴더 같은 곳에 따로 보관하는 것이 아닌 서랍 안처럼 한 줄로 길~~ 게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런 특이한 구조로 인해 일반적인 디지털 제텔카스텐과 루만의 제텔카스텐은 꽤 많은 차이를 보인다.
디지털 제텔카스텐이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것들부터 알아보자.
아마, 제텔카스텐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읽다 보면 한 번씩은 마주치는 내용일 것이다.
연결의 중요성: 디지털 제텔카스텐은 메모 간의 연결을 통해 비선형적인, 창의적인 사고를 유도한다.
원자 메모 : 메모는 다른 메모와 연결해야 하므로, 충분히 원자적이어야 한다.
구조 노트: 여러 메모를 유기적인 구조로 연결해서 자연스러운 사고를 이끌어야 한다.
일단 뭐.... 꽤 괜찮은 이야기 같다. 이론적으론. 하지만...
실제로 제텔카스텐을 사용하다보니, 꽤 혼란을 일으켰다.
연결: 무엇을, 어디까지 연결해야 할까? 고양이와 학교는 연결해도 될까? 아닐까? 관련 있는 걸 다 연결해야 하나?
원자성: 어디까지가 원자인가? 문단 하나? 문장 하나?
구조 노트: 구조 노트는 어디까지? 몇 개나? 늘어날수록 관리해야 하는 부담은?
니클라스 루만이 원래 사용하던 방식-서랍구조는 이러한 문제를 꽤 많이 해결한다.
(정확히는 저 개념들이 디지털 제텔카스텐의 닫힌 구조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는 게 맞다.)
학교와 고양이는 연결해야 할까? 아닐까?
'고양이가 좋아하는 음식은?'이라고 생각하면, 고양이와 학교는 연결되지 않는다.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곳은?'이라고 생각하면, 고양이와 학교는 연결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고민이 계속되는 이유는 '질문'에 따라 연결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연결하자면, 다른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게 되고, 최대한으로 연결하면 궁극적으로는 모든 메모가 연결되는 혼돈상태가 된다.
루만의 서랍 구조는 열린 선형 구조다.
A메모에 B메모가 연결이 되어 있다면 B메모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메모까지 눈에 들어오게 된다.
특정 'B메모를 참고하라'가 아닌 'B 메모 근처에 관련된 메모가 많으니 탐색해보라.'라는 의미가 된다.
선형구조에서는 A메모도 A메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근처 관련된 메모들을 탐색 해나가게 된다.
즉, 이미 모든 메모는 크게든, 작게든 이미 연결되어 있다. 마치 우리의 뇌처럼 말이다.
그래서 서랍 구조에서의 연결이란 연결이 아닌, 탐색이다.
위 이미지에서 보자. 고양이와 학교는 연결해야 할까? 선형구조에서는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고양이의 메모들로부터 탐색해 나가다 보면 '학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의 관련성을 확인해가며 머릿속의 질문에 따라 그 메모를 선택할지 말지가 결정하면 된다.
메모가 10000장쯤 생겨서 메모 사이가 너무 멀어지면, 그때쯤 '고양이 출몰 장소' 정도로 메모를 끼워 넣고 학교로 연결해두면 된다. (루만은 문제를 해결하고, 연결하면 된다라고 표현한다)
'고양이의 외모는 대부분 예쁘다. 하지만, 예쁘지 않은 고양이도 있다.'
위 문장은 원자적일까 아닐까?
고양이의 외모에 대한 내용이니, 어떻게 보면, 원자적인 것 같다.
하지만, '고양이는 예쁘다'와 '예쁘지 않은 고양이도 있다.'로 나눌 수 있으니 원자적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럼 '고양이는 예쁘다'는 원자적일까? '고양이'와 '예쁨'으로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혼란스럽다.
이처럼 원자성 판단이 헷갈리는 이유는 질문에 따라 원자성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루만의 서랍 구조에서 원자성은 크게 의미 없어진다.
해당 메모로부터 시작해 질문이 원하는 곳까지 읽어 내려가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고양이의 외모'라면, 외모에 관한 메모까지
'고양이가 예쁘다'에 관한 것이라면 해당 메모만 보면 된다.
'고양이'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라면 고양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어, 원자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원자성은 디지털 제텔카스텐에서 메모들을 한눈에 보지 못하면서 생긴 관리 개념이다.
루만의 구조에서는 무의미하다.
구조 노트가 사용되는 이유는 관련 있는 것들끼리 모아서 하나의 의미로 정리하기 위함이다.
모아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각각의 메모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구슬 목걸이를 만들듯 구조에 맞춰, 각각의 메모를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구조 노트는 보통 주제별로 여러 개가 만들어지게 되며, 이 구조 노트를 모으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점점 늘어나는 구조 노트는 점점 늘어나는 관리비용을 의미한다.
루만의 서랍 구조는 이미 '관련된' 것끼리 가까이 모아두는 개념이다.
루만의 서랍 구조에는 구조 노트가 필요 없다.
메모의 배치가 이미 여러 구조 노트를 모아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미 구조화되어있다.
아래 이미지를 보자.
전체 구조 안에 고양이 구조 노트, 고양이의 특성 구조 노트, 학교 구조 노트 등이 같이 보이지만, 따로 노트를 만들 수고가 필요 없어진다.
앞서, 원자성과 관련지어 이야기해보자면, 구조 노트는 새로운 '원자성'을 만드는 것과 같다.
원자적이어야 한다면서 또 다른 원자성을 만든다는 디지털 제텔카스텐의 방식은 아이러니하다.
루만의 방식에는 여러 메모들의 주소를 모은 인덱스 노트라는 게 존재하고,
얼핏 구조 노트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인덱스카드'가 '구조 노트'가 아니냐?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구조 노트는 특정 메모를 구조적으로 모아 하나의 의미를 구성하는데 비해,
인덱스카드는 주제에 편하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진입점 모음이라고 할까?
인덱스카드를 지하철 노선도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노선도를 보고, 특정 역에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역에 내리는 이유는 그 역에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역에 내린 다음 근처 가게로 들어가 영화를 보든, 밥을 먹든 하기 위해서다.
인덱스카드도 마찬가지다. 구조적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특정 주제 근처로 간 다음, 거기서부터 필요한 메모를 찾아나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 차이를 이해한다면 인덱스카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샤샤나 숀케 아렌스의 디지털 제텔카스텐의 원론적인 문제점은 모든 메모가 '닫힌 방'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필요한 방들 사이를 연결해나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원래 방식인 서랍 구조 - 열린 선형구조는 이러한 과정이 없기에 많은 장점을 가진다.
디지털 제텔카스텐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면 진짜 니클라스 루만의 '제텔카스텐'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