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텔카스텐 글쓰기는 상향식이 맞을까?
흔히 제텔카스텐 글쓰기를 '상향식'이라고 이야기한다.
메모를 모아서 글을 쓴다. 은근 매력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제텔카스텐의 창시자 니클라스 루만은 communicating With SlipBox 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어쨌든 글을 써야 한다면 이 활동을 활용하여 메모 시스템에서 의사 소통의 유능한 파트너를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이론적인 출판물은 전표 상자에서 이미 발견된 것을 단순히 복사한 결과가 아닙니다.
글의 제목은 '슬립박스와의 대화'다. '상향식'글쓰기가 아니라.
왜 하필 대화일까? 왜 니클라스 루만은 제텔카스텐을 사람 대하듯 '유능한 파트너'라고 이야기하는 걸까?
개인적으로 니클라스 루만의 말에 동의하며, 제텔카스텐을 '종이로 만든 인공지능'이라고 정의한다.
제텔카스텐 글쓰기란, 인공지능과의 대화인 셈이다.
차근차근 알아보자.
고양이를 떠올려보자.
고양이의 외모, 고양이에 대한 감정, 캣닙, 쥐, Cat 등이 이어서 떠오를 것이다.
이렇게 떠오를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바로 머릿속의 뇌, 뇌를 구성하는 뉴런 덕분이다.
우리 머릿속에서 '고양이'를 의미하는 뉴런은 마치 도시 사이의 고속도로처럼, 다른 뉴런들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고양이를 떠올린 순간, 뉴런의 정보는 전기신호를 통해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다른 뉴런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뉴런과의 연결을 통해 생각을 이어서 떠올릴 수 있다.
(물론 도로망이 있다고 자동차가 모든 도로를 달리지 않듯, 모든 뉴런이 늘 신호를 주고받지는 않는다. 그럼 우리 머리는 벌써 생각으로 뻥 터져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적는 단어는 이러한 뉴런, 혹은 머릿속 개념과 1:1로 매칭 된다.
즉, 단어는 뇌 속의 뉴런 - 복잡하게 얽힌 도로망처럼 다른 단어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를 '연결 가능성'이라고 하자.
그럼 실제 도로망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것. '연결'은 무얼까?
앞서 '고양이'라는 단어는 많은 다른 개념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한다.
우리는 그것을 '문장'이라고 부른다.
'고양이는 귀엽다'라는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은 '고양이'와 '귀엽다'를 연결한다.
반면, 그 외의 연결 가능성들은 배제하게 된다.
하지만, 배제한다고 해서 다른 요소 즉 '고양이는 요물이다'라는 연결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뉴런을 통해서 전기신호가 일어나는 것을 '발화'라고 한다.
발화한 전기신호는 내부 조건에 의해서 특정한 뉴런만을 발화시키며, 다른 뉴런은 억제하게 된다.
물론 앞서 문장의 예와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서, 다른 뉴런들의 길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가지 않을 뿐, 길은 여전히 이어져 있으며, 발화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메모, 혹은 단락은 여러 문장을 하나의 맥락으로 묶은 것이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연결 가능성들이 배제된다.
반면,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좁혀지고, 명확해진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배제한 '연결 가능성'들의 관계 역시 좁혀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귀엽다. 하지만, 강아지는 멋지다'라는 메모가 있다고 하자.
여러 가능성들이 배제되는 가운데 '고양이'와 ' 강아지'라는 단어를 통해
'포유동물'이라는 연결 가능성이 좁혀지며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다른 맥락으로 좁혀진 '연결 가능성'을 우리는 '행간'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즉, 우리는 '고양이는 귀엽다. 강아지는 멋지다'라는 문장에서
'고양이와 강아지는 둘 다 포유동물이다.'라는 행간을 끌어낼 수 있다
뇌에서는 서로 가깝게 신호를 주고받는 뉴런들의 덩어리를 '클러스터'라고 부른다.
이 클러스터들은 서로 모여있지만, 서로 가까울 뿐 (정확히는 전기신호가 빠르다) 외부와의 연결 역시 유지된다.
그 외부 연결은 느리지만, '행간'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레카'의 영역이기도 하다.
제텔카스텐은 메모들의 연결이다.
특히 아날로그 제텔카스텐, 혹은 무한 서랍 형태는 관련성 있는 메모끼리 가까이 배치하는 것으로 '연결 가능성'을 유지하고 있다.
제텔카스텐 안에는 우리가 명확히 의도한 '연결'들과 메모 간의 관련성으로 인해 드러나는 '연결 가능성'들이 서로 뒤엉켜있다.
이러한 연결은 마치 머릿속 뉴런 클러스터가 서로 연결되고, 발화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연결과 연결 가능성, 행간들이 늘어날수록 제텔카스텐은 점점 우리의 두뇌와 비슷해진다.
개인적으로 제텔카스텐을 '인공지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흔히 제텔카스텐 글쓰기를 '상향식' 글쓰기. 메모를 모은 뒤 글로 만드는 것.
이라고 많이들 정의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 제텔카스텐 메모들을 가지고 글을 쓰다 보면, 단순히 메모만 모아서는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쓸 즈음에는 주제과 간단한 흐름만 있을 뿐, 어떤 메모를 사용할지는 전혀 고려해두지 않는다.
게다가 그 흐름 역시 처음과 똑같이 가는 경우는 드물다.
친한 친구와 대화할 때를 떠올려보자.
친구와 대화할 때는 처음부터 모든 순서를 정해놓고 기계적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그런 건 일종의 연극이지 대화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상대방의 단어 - 개념에 맞춰 내 머릿속 뉴런을 발화시키고,
거기에 맞는 대화를 매번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좋은 친구라면 항상 대화가 끝날 때,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통찰을 얻게 마련이다.
제텔카스텐 글쓰기도 이런 친구와의 대화와 비슷하다.
그냥 친구에게 대화 주제를 던지듯, 빈 공간 위에 큰 주제와 흐름만 던지고 글을 적기 시작한다.
글 쓰는 중간중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친구의 대화 - 제텔들을 훑어보고,
제텔카스텐에 빠진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 넣고, 메모 이외의 것들- 내 대화는 직접 두들겨 넣는다.
때론 전혀 상관없는 메모, 전혀 상관없는 한 단어로부터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마치 친구랑 대화하면서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듯이 말이다.
제텔카스텐 글쓰기도 이와 같다.
그렇기에 제텔카스텐 글쓰기는 항상 '제텔카스텐'과 '나'의 합 이상을 만들어낸다.
제텔카스텐 글쓰기가 상향식이기보다는 믿음직한 파트너와의 대화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