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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Apr 06. 2018

그깟 종이 쪼가리가 아닙니다!

근로계약서에 대하여. 

인사노무팀이라니...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상상조차 못 한 팀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바쁜 일이 조금씩 정리되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이제는 조금 쉴 수 있겠다, 싶었던  차에 뜻하지 않은  인사발령 소식이 민주에게 날아왔다.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었다. 당사자의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명령이었다. 그래서 명칭도 발령(명령을 내림)이었다. 인사, 특히 전직에 대한 명령을 내릴 때에는 서로 간 신뢰관계를 고려해서, 합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협의'라도 하라는 판례가 있지만(대법원 1995.10.13. 선고 94다52928판결) 현장에서는 다 써버린 휴지조각처럼 짓밟히고 버려질 뿐이었다.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었다.


권력 부서라는 이유로 내심 인사노무부서에 가고 싶어 하는 직원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민주는 아니었다. 기획부서나 교육부서가 좋았다. 관리부서, 그것도 사람에 대한 일, 인사를 관리하는 부서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명령은 내려졌고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인사에 대한 명령 불복종은 중요한 징계사유였다.


이번 특별 인사발령은 유독 인사노무팀에 집중되었다. 최근 벌어졌던 몇 건의 사건 때문인 듯했다. 문책성 인사발령이었다. 하필이면 박동우 장이 인사노무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인생은 녹녹하지 않았다.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원치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졌다.  


'내 인생은 머피가 지배하고 있는 건가?'


민주는 마치 자기의 인생이 머피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 가는 듯 느껴졌다.




"이대리, 잠깐 볼까?"

"네, 팀장님..."


팀장은 낮은 소리로 민주를 불렀다.


"이번에 자기하고 나하고 왜 발령 났는지, 알지?"

"네? 아, 네... 짐작은 가지만 정확히는 잘..."


"오프 더 레코드(off-the-record : 비밀로 해야 할 비공식 발언)야... 이제 인사노무팀에 왔으니까, 앞으로 나랑 하는 얘기는 다 비밀이라고 생각하면 돼. 인사는 기밀이 생명인 거, 알지?"

"네"


"저번에 알바 사건 때문에 사장님이 인사팀장한테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과태료가 꽤 나왔어. 벌금도 냈고... 사장님께서 나한테 제도를 다시 정비하라고 지시하셨어. 특히 알바 제도 손질 좀 보라고..."

"아, 그렇군요... "


민주는 팀장회의에서 나온 민감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팀장이 왜 자기한테 세세하게 얘기하는지, 의아했다.


"내가, 자기 특별히 추천했어. 인사팀장 시킬 거면, 우리 팀에 이대리 좀 보내 달라고 말이야."  

"네? 저를요? 저는 왜..."


"이대리, 저번에 면접 볼 때 그랬었지? 예전에 알바 많이 했었다고. 경험보다 중요한 건 없어. 뭐가 문제인지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냐? 그리고, 페이퍼 작성도 잘하고. 사실 이전부터 인사노무팀에 있으면 더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


민주는 순간, 박팀장이 자신의 면접위원으로 참석했던 기억이 났다. 기억을 완전히 되살리기도 전에 박팀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대리. 좋은 기회다, 생각해. 인사팀은 다른 팀에 비해서 승진이 빨라. 조만간 과장 승진 있는 거, 알지? 이번 제도만 잘 정비하면 이대리한테 좋은 찬스가 올 거야. 알겠지?"

"아, 예, 예... 알겠습니다"


"이대리, 저번에 내가 소리친 건 다 잊어버려. 내가 이대리, 미워서 그랬겠어? 솔직히 직장생활, 쓴 맛도 좀 느껴 봐야지, 한 뼘 더 성장할 거, 아냐? 그냥 내가 이대리 좀 키우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해. 여자가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좀 독해져야 해. 물렁물렁 보였다간 여지없다고."


기억해. 
직장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거야. 
물이 없어 죽는 게 아니야. 
물을 못 찾아서 죽는 거지.
그래서 정치가 필요한 거고. 
줄 잘못 서면, 그 라인 다 죽는 거야.
누구한테 줄을 서야 하는지도 잘 생각해.
그게 사회생활이고, 현실이야.


박동우 팀장은 이상하리만큼 장황하게 자기의 속내를 민주에게 내 보였다. 민주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민주가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다,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 팀에 온 이상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길이었다. 굳이 저는 그 라인, 아닙니다, 얘기하는 것도 이상했다. 


부하의 뜻이 아니라 
상사의 권력의지가 라인을 만들었다.


'까짓것 일단 가 보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라도 해야지... '


다음 주 초까지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이런저런 정치문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까라면 까야하는 군대식 조직문화에서 민주의 선택지는 없었다. 겉으로는 '절대 충성'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민주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컴퓨터 바탕화면의 파워포인트 바로가기를 클릭했다. 제목을 큼지막하게 적어 보았다.




"단시간 근로자의 운영현황 및 제도개선(안)"


민주는 이번 알바 사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생각이 스토리가 되고 스토리가 보고서로 이어진다. 보고서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사건의 경위를  점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A4용지 위에 스케치를 하듯 그려 보았다. 소설을 쓰듯 끄적끄적해 보았다. 펜대를 굴려야 생각도 함께 움직였다.


근로계약서 미작성의 건


홍보팀에서 판촉물을 나눠주는 알바생 10명을 10일간 고용하면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알바생 5명이 한꺼번에 노동부에 근로계약서 미작성으로 고소했는데 벌금이 300만원 부과되었다. 인사노무팀의 안일한 대응과 홍보팀의 허술한 알바생 관리, 도를 넘어선 갑질 언어폭력이 문제였다. 근로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해서 교부하지 않으면 벌금이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몰랐다. 조그마한 가게의 사장들은 실제 이런 내용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노동자나 사용자나 이런 법을 배우지 못한 건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인사팀과 총무팀이 분리돼 있는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이런 기본적인 내용도 지키지 못했다니...

민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근로기준법 제17조 근로조건의 명시(변형)]
② 사용자는 임금의 구성항목ㆍ계산방법ㆍ지급방법 및 소정근로시간, 유급주휴일,연차유급휴가의 사항이 명시된 서면을 근로자에게 교부하여야 한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17조 근로조건의 서면명시]
사용자는 기간제근로자 또는 단시간근로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때에는 다음 각 호의 모든 사항을 서면으로 명시하여야 한다. 다만, 제6호는 단시간근로자에 한한다.
1. 근로계약기간에 관한 사항
2. 근로시간·휴게에 관한 사항
3. 임금의 구성항목·계산방법 및 지불방법에 관한 사항
4. 휴일·휴가에 관한 사항
5. 취업의 장소와 종사하여야 할 업무에 관한 사항
6. 근로일 및 근로일별 근로시간
근로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여 교부하지 않은 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근로기준법 제114조)

(기간제나 단시간 근로자의 경우) 근로조건을 서면으로 명시하지 아니한 자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한다.(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24조 제2항)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고용노동부 사이트(http://www.moel.go.kr)에서 표준근로계약서라는 이름으로 클릭만 하면, 근로계약서의 샘플을 볼 수 있었다. 만 18세 이상 근로자, 만 18세 미만 근로자, 건설일용근로자, 단시간 근로자로 구분해 놓았다. 빈칸을 채우기만 하면 됐다. 그 작업 하나 수행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났다. 


발단은 휴게시간이었다. 판촉물을 돌리는 시간은 5시간이었다. 알바생들은 쉬는 시간도 없이 일을 했고, 그중 두세 명이 휴게시간을 요구했다. 그때 적절하게 휴게시간을 부여했다면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배부른 소리, 한다. 너희들 사회생활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열심히 해서 한 푼이라도 벌 생각을 해야지. 너네들 그런 마인드로 앞으로 제대로 취업이냐 할 수 있겠냐? 정신 좀 차려! 일당 알바 주제에 뭔 말이 그리 많아? 그럴  거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


정당한 법적 요구에 반사돼 온 건 언어폭력이었다. 갑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일부가 된다.


 갑질은 생활습관이다.


홍보팀장은 자신의 말을 오랜 사회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진국과도 같은 충고라 여겼다. 알바생이 아닌, 정규직 부하직원에게도 동일한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부하직원들은 침묵했고 홍보팀장의 갑질은 회사 내에서 묵인되었다. 그냥 뒤에서 꼰대라고 수군 수군대며 뒷담화를 해댈 뿐이었다.


홍보팀장은 쌍팔년도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알바생들은 온갖 지식들이 스마트폰에서 저장되고 공유되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사고방식이 달랐고 쓰는 말이 달랐다.


사실상 다른 종족이었다. 

알바생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쌍팔년도의 언어에  분노했다. 정규직 부하직원과 다른 점은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당장 카카오톡으로 대화방을 개설했다. 이후의 행동방향을 토의했다. 굳이 모여서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스마트폰의 가상 회의장에서 결론을 냈다. 한 번 더 휴게시간을 요구하기로 했다. 덧붙여  한 주에 15시간 이상 일하기로 했으면 지급해야 하는, 주휴수당도 요구하기로 했다. 묵살당할 경우, 일단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걸 이유로, 형사 고소하기로 뜻을 모았다.


홍보팀장은 쌍팔년도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한 번 더 언어폭력을 가했다(물론 그는 자신의 말을 폭력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뭐? 이제 주휴수당? 이것들이 돌았나? 홍보팀 직원들, 다 신문방송학과 선후배인 건 일지?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야. 너네들 앞으로 이 바닥에 발 붙일 생각하지 마. 다른 애들은 나중에 취업하려고 돈 안 받고 일하는 경우도 있어. 열정 페이가 그렇게 잘못된 거냐? 그게 현실이야. 이것들이 용돈에 보태 쓰라고 최저임금도 꼬박꼬박 맞춰 줬더니, 뒤통수를 치시겠다... 판촉물 좀 나눠주는 게 일이냐? 분수를 알아야지. 줘도 안 받겠습니다, 해야 할 판에. 한심한 놈들.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돼 있군..."


다른 사람의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좁은 책상이 유일한 세계였고, 자신의 편협한 의견이 유일한 진리였다. 알바생들의 불안을 무기 삼아 갑질을 행사했다. 저급했다. 하지만 그 저렴한 협박에도 알바생들은 떨었다. 향후 취업할 때, 진짜 불이익이 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 두려움은 갑에게는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10명 중 5명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하지만, 5명이 남아 있었다. 남은 자들의 결단과 용기로 홍보팀장은 직위가 해제됐고 인사노무팀장 및 담당자는 다른 팀으로 발령 났다.


자본주의의 세계. 그 적자생존의 냉정한 세계에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건 예의다. 
문서로 남지 않은 합의는 쉽게 갑질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경우, 벌금이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을에게 최소한의 무기를 손에 쥐어 주자는 거다. 최소한의 요구조차 묵살하며, 사회생활 잘 하라며 되려 충고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거다.


민주는 근로계약서 미작성 사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며, 해결방안을 적었다. 대안이라 할 것도 없었다.




III. 해결방안 : 계약서 작성 및 교부 의무 준수 (담당자 교육)


민주는 민망했다. 이걸 대안이라고 적고 있다니...  

하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기본인 거지... 민주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10일간 일한 그 알바생들을 떠올려 보았다. 짧은 기간 동안 사회생활이라며 감수해야 했던, 언어폭력의 충격은 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뇌와 가슴에 새겨져 있을 게다. 벌금 300만원으로 그 감정의 상처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보고서에 언어폭력에 대한 문제도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팀장 선에서 삭제될게 뻔했다.

그저 타이핑을 하면서 조용히 중얼중얼거릴 뿐이었다.


'계약도 없이 일을 시키면 안 되지... 언어가 폭력이 되면 안 되지... 열정이라는 포장으로 페이가 증발하면 안 되지...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예의도 없는 것들!'


제11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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