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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Mar 30. 2018

이게 쉬는 겁니까?

휴게시간과 대기시간에 대하여.

필연 또는 우연



부부만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모두 나름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 그게 악연이든, 선연이든 그 모두가 우연과 필연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연은 그렇게 불쑥불쑥 우리네 삶의 시간표에서
예정도 없이 그 모습을 드러 낸다.


민주가 한신을 지하철에서 본 건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가산디지털단지역의 출퇴근길은 거대한 인력시장과도 같다.  그저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로 프로그래밍돼 있는 로봇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고 미미한 생기도 느낄 수 없는, 고독한 군중이 지하철 역사를 가득 채운다.

민주도 터덜터덜, 이름 없는 거대한 군중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막강한 군중의 힘이 민주를 한 방향으로 몰아붙인다.


그런데 흐름을 거슬러 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민주에게로 걸어오는 듯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민주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무리와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잡다한 가십거리들을 보면서 무리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누나? 혹시 민주 누나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며 민주가 고개를 들었다.

한신이었다.


"아, 한신이구나... 이게 얼마만이니?"

"그러게요. 저 앞에서 보니까 누나 같아서요. 진짜 반가워요. 누나. 시간 돼요? 근처에 별다방이라도 가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차마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한신에게는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커피 한 잔이라도 대접하자, 싶었다.


한신은 계속 취업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녹녹하지 않다, 했다. 위로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음 주에 우리 회사, 입사 지원받아. 한 번 지원해 봐."

"에이. 누나 회사 좋잖아요. 저 같은 애, 거들떠나 보겠어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좋은 회사라... 민주는 그냥 피식 웃었다.


"어쨌든 한 번 넣어 봐. 누가 알겠니? 나도 들어왔는데..."




한신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인간이었다. 겉으로는 정말 평범해 보이는 친구였다. 하얀 피부에 표준말을 구사하는, 조용히 할 일을 알아서 하는,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비판의식이 많은 아이였다. 관행을 거부하는 모범생이랄까. 모순 같지만, 한신에게는 딱 맞는 표현이었다.


돌이켜 보면, 민주가 알바로 근무했던 매장은 법적으로 세 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문제는 공식적인 근무시간 이후에는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을 꺾어 버렸다. 이 문제는 서연이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을 해서 해결했다. 한신의 도움이 컸다.

둘째 문제는 임의로 조퇴를 시키고는 휴업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민기가 언론에 터트리면서 해결했다. 한신이 민기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셋째 문제는 휴게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한신이 직접 해결했다.


한신은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불합리한 점이 있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었다. 스스로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았다.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확신이 들 때까지 공부하고, 확신이 생기면 행동했다. 

거침이 없었다. 사실 그 속을 알 수 없기에, 조금 힘들고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점장도 대기시간의 문제를 한신이 직접 따지기 전까지는 한신을 그저 말 잘 듣는, 다루기 좋은 알바생으로 알았을 것이다.  




휴게시간 또는 대기시간



"자, 손님 없으니까, 한 20분 정도 저쪽 자리에서 앉아서 쉬어"


점장은 손님이 없을 때, 알바생들을 돌아가면서 쉬게 했다. 하지만, 손님이 많을 때에는 쉬고 있다가도 다시 매장에 투입되곤 했다. 

쉼이라기보다는 대기라는 표현이 적당한 상황이었다. 점장의 속내를 알 수 없던 알바생들은 쉼을 즐겼다. 하지만, 한신은 쉼이 아니라, 돈이 점장의 목적임을 이내 간파했다. 


"점장님, 그냥 쉬는 건가요? 돈은 나오나요?"

"응? 뭐? 아, 일단 손님 없으니까, 쉬는 거지..."


점장은 말을 얼버무렸다. 곰곰 생각해 보면, 뼛속까지 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부모님 몰래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다가 들킨 학생처럼, 한신의 질문에 점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한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점장님, 쉬게 해 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돈은 통장에 넣어 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어, 어... 한신아, 일단 쉬어. 알았지?"


한신은 장난을 치듯이 점장에게 말했지만, 점장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전쟁의 계략을 적에게 간파당한 장수처럼,  점장은 자리에 앉아 입에 무언가를 넣고서 얘기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을 중얼거렸다.


한 달 후, 결국 일이 터졌다.

한신은 알바노조의 간부들과 함께 등장했다. 확신한 모양이었다.  


매장의 바깥 한 공터에서 알바노조의 조합원들로 보이는 무리들이 오와 열을 맞춰, 구호를 외쳤다. 한 간부는 "나는 쉬고 싶다"는 팻말을 들고 있었고, 한 간부는 "휴게시간을 보장하라"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한신은 그 무리의 맨 끝에서 "대기시간에는 임금을!"이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한신은 집회 신고를 마치고, 접수증을 받아 두었다. 한신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철두철미하게 일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6조(옥외집회 및 시위의 신고 등)]  
①옥외집회나 시위를 주최하려는 자는 그에 관한 다음 각 호의 사항 모두를 적은 신고서를 옥외집회나 시위를 시작하기 720시간 전부터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다만, 옥외집회 또는 시위 장소가 두 곳 이상의 경찰서의 관할에 속하는 경우에는 관할 지방경찰청장에게 제출하여야 하고, 두 곳 이상의 지방경찰청 관할에 속하는 경우에는 주최지를 관할하는 지방경찰청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1. 목적
2. 일시(필요한 시간을 포함한다)
3. 장소
4. 주최자(단체인 경우에는 그 대표자를 포함한다), 연락책임자, 질서유지인에 관한 다음 각 목의 사항
    가. 주소 
    나. 성명
    다. 직업
    라. 연락처
5. 참가 예정인 단체와 인원
6. 시위의 경우 그 방법(진로와 약도를 포함한다)


점장이 나왔다. 한신을 따로 불렀다.


"뭐야? 왜 이래? 한신씨? 정말 이렇게 하기야? 이거 업무방해인 거 몰라?"

"법적 절차, 다 밟아서 집회 개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게 왜 자꾸 법을 어기십니까?"


"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희들 같은 알바생을 만났는지... 어쨌든 알겠으니까, 빨리 접어."


사실 한신의 요구사항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었다. 하긴 그 단순한 사항조차도 민주는 잘 몰랐다. 민주는 한신이 설명하기 전까지는 대기시간이 뭔지, 휴게시간이 뭔지 몰랐다. 휴게시간이라는 용어 자체도 입에 착착 달라붙지 않았다. 한신과 대화를 하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됐다.


법은 무지를 이해하지 않는다.


법은 상냥한 남친이나 여친도 아니고,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엄마도 아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기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차가운 엘리트 교사와 같다.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결국 한신의 단단한 지식 앞에, 점장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지식으로 여러 알바노동자가 권리를 찾았다. 하지만, 한신은 그 다음 해에 매장을 나와야 했다. 계약이 연장될 리 만무했다.


한신은, 사람이 기계가 아니므로, 일하는 도중에 쉬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걸 휴게시간이라 했다. 쉴 휴(休) 자에 쉴 게(憩) 자를 썼다.



휴게시간과 대기시간 관련 법률



알바를 하던 그 시절, 한신이 말했었다.


"누나, 근로기준법에서는 휴게시간을 주도록 하고 있어요. 그거, 알고 있어요?"


법을 뒤져 보았더니, 휴게시간이 나와 있었다.


[근로기준법 제54조(휴게)]
①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어야 한다.


민주는 조금 이상했다. 한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도 돌아가면서 근무시간에 쉬었잖아. 그게 휴게시간, 아니니?"


한신이 54조 2항을 보라, 했다. 과거에 전태일 열사가 이런 식으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 좀 아는 친구를 사귀기 원했던 전태일이 지금 이 시대에서 한신을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근로기준법 제54조(휴게)]
② 휴게시간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휴게시간은 근로자가 자유롭게 이용하는 시간이에요. 우리는 자유롭게 쉬는 게 아니죠. 손님 많으면 다시 나가봐야 하고, 점장이 이것 좀 치우라고 하면 치워야 하고... 그건 휴게시간이 아니에요."


휴게시간은 자유시간이라, 했다. 사용자의 지휘, 감독에서 완전히 해방된 시간... 그래서 휴게시간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주는 그래도 무언가 이상했다.


"한신아, 그래도 우리가 그 시간에 뭔가 일을 한 건 아니잖아. 그 시간에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아니에요, 누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우린 일을 한 거예요. 뭔가 쉬는 것처럼 보여도 점장이 여전히 우리에게 지시할 수 있잖아요. 그게 바로 근로시간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걸 근로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누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법에서 아예 그런 시간에 대해서 만들어 놓았어요. 대기시간이라고..."


[근기법 제50조(근로시간)] 
③ 제1항 및 제2항에 따른 근로시간을 산정함에 있어 작업을 위하여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 대기시간 등은 근로시간으로 본다.


"그럼, 대기시간에는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거야?"

"그럼요. 근로시간이니까요..."


"그럼, 점심시간은 뭐야? 그건 휴게시간인 건가?"

"네. 원래 점심시간은 자유롭게 밥을 먹는 시간이니까요. 그 시간에 밥을 먹든지, 산책을 하든지, 그건 자유니까요."


"그럼, 사실은 점심시간에 일을 시키면 안 되겠구나."

"그렇죠. 휴게시간이라서 돈이 안 나오니까요. 만약 일을 시키면, 원래 그 시간만큼 임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거죠."


민주는 자기 아파트 경비분들의 수면시간이 5시간에서 6시간으로 늘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휴게시간으로 그 시간을 지정하면 임금지급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야, 어젯밤 손석희 앵커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 '치약 그리고 장미꽃']
http://tv.naver.com/v/2559501


휴게시간으로 지정해 놓고서도 일을 시키고,
동시에 임금은 지급하지 않는,  
모순덩어리의 괴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휴게시간과 대기시간의  경계에 서 있는, 시간들...


모호한 것만큼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없다.


휴게인지 대기인지 선택해야 한다. 양다리를 걸치고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연인이랄까. 그런 어정쩡한 태도는 서로를 힘들게 한다.  


한신이 말했다.'휴게는 휴게답게 보장되어야 하고 모호한 대기시간이라면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라고.


어쨌든 한신 덕분에 민주는 휴게와 대기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대기시간은 항상 긴장돼 있었다. 쉬는 것도 아니었고, 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어라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애매모호한 시간이었다. 그건 온전한 쉼이 아니었다.


온전한 쉼을 "휴게"라 부르고, 
사이비 같은 쉼을 "대기"라 부르는 거구나...


한신의 설명을 듣고 나니, 매장의 문제가 눈에 보였다.

법상 보장돼야 할 휴게시간이 없었고 대기시간만 있었다. 그마저도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한신은 그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매장에서 나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취업준비생으로 민주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럼, 누나 회사에 원서는 내 볼게요. 제가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요. 누나랑 같이 일하면 좋겠네요... 고마워요, 누나."

"그래, 한신아. 꼭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커피는 인생의 맛이 담겨 있는 음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달한 카라멜 마끼아또, 평범한 아메리카노, 약간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라떼, 작고 앙증맞은 잔에 씁쓸하고 진한 커피맛이 농축돼 있는 에스프레소까지.

오늘 한신과의 만남은 어떤 커피가 어울리는 만남이었을까. 


민주는 돌아오는 길에 설핏 인사팀 상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회사에서 근무중에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은 휴게시간이 아니라, 대기시간인 거지... 그걸 휴게시간이라고 우기다니, 참나...’


커피 한 잔, 사람과의 대화 한 모금이 그리운 날이었다. 


제10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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