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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Mar 23. 2018

닥치세요! 나는 당신 딸이 아니라고요!

직장내 성희롱에 대하여 

A4용지 vs 노동자 


하지만, 이제 서연은 더 이상 송곳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프린터 밑바닥의 A4용지만큼도 존중받지 못하는,  
힘없는 한 여성 노동자일 뿐이었다.




팀장은 서연의 병가 신청을 거절했다. 서연은 알바시절의 연차휴가를 떠올렸다.  

욱하는 마음에 연차휴가를 신청할까 했지만, 차마 마우스의 클릭 버튼을 누를 수는 없었다.

찍히는 게 싫었다. 찍힌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서연은 경험치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연차휴가에 대한 권리가 법적으로 강력하게 보장되어 있다 한들, 무엇하랴. 찍히면 끝이었다. 영혼까지 불태워야 하는 조직문화는 그깟 법 따위, 라며 서연을 조롱하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과 아픈 몸을 이끌고 서연은 금요일, 출근했다. 여전히 콧물이 흘렀고 기침이 났다. 얼굴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팀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몰라도 "굿모닝"을 외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다. 9시의 출근 시계는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어제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조금 더 깨어졌을 뿐이다. 


성희롱, 생활이 되다.



"굿모닝. 박주임"


김승규 과장이었다. 김과장은 어제 서연과 팀장과의 모든 대화를 들었다. 자리에 앉아 파워포인트를 만지작거리다가도 가끔씩 두 사람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서연을 동정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팀장을 지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주인공의 세심한 심리 변화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소설의 결과만 슬쩍 읽어 보고선 책을 다 읽었다고 주위에 자랑해 대는, 그런 심리의 반영이랄까. 김과장은, 마치 소설의 내용은 읽지도 않고서 결론만으로 주인공을 이해한다고 얘기하는 거만한 독자, 같았다.


"박주임, 얼굴이 조금 빨갛다. 혹시, 오늘... 그 날이야?"

"예? 그게 무슨 말이세요?"


"괜찮아. 나한테는 얘기해도 돼. 팀장도 자기랑 같은 여자면서 참... 눈치껏 오늘 좀 쉬게 해주지. 안 그래?"


휴게실에서 힘겹게 유자차 한 잔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서연에게 김과장이 말했다. 

천지분간을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김과장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위로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화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터진 입으로 나오는, 의미 없는 모음과 자음의 결합, 같은 거였다. 대꾸할 힘도 없었고, 그럴 가치도 없었다. 직속 상사와 부딪혀 봤자, 서연에게만 손해였다. 

서연은 나지막하게 "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사실, 위로가 아니라 성희롱이었지만, 서연은 그냥 참았다. 

김과장에게 성희롱의 역사와 법리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참는 게 더 편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태복음 7장 6절)



서연의 입사 첫날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알바와 계약직의 생활을 청산하고, 굴지의 대기업체, 정규직 주임으로 첫 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지원본부의 회식이 있었다. 지원본부 밑에는 3개의 팀이 있다. 지원본부장과 소속 팀장, 그리고 출장 및 휴가로 자리를 비운 팀원들을 제외한, 전체 팀원들이 참석했다. 

지원본부의 각 팀에 새로 들어온 5명의 신규 입사자들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3명이 남자였고 2명이 여자였다. 서연은 그중 한 명이었다.


서연은 김승규 과장과 함께 회식 자리에 도착했다. 이미 자리는 세팅되어 있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본부장 옆의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한 자리는 서연의 몫이었고, 또 한 자리는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인 미나의 몫이었다.

출발은 괜찮았다. 본부장의 건배사가 있었고, 팀장들의 덕담도 이어졌다. 

서연은 이제 꽃길만 걸어야지, 라는 다짐을 하면서, 모든 회식의 과정들을 긴장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창 취기가 오르고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 무렵, 김과장이 서연에게 고갯짓을 하면서 약간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어이, 서연씨, 뭐해? 본부장님 술잔 비었잖아. 한 잔, 따라드리지 않고 뭐해?"

"네? 네... 알겠습니다"


회식 자리는 혼란스러웠다. 아무 생각도 없이 서연은 술병을 들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푸근한 느낌의 본부장은 술잔을 몇 잔 건네받으면서, 이미 개가 되어 있었다.

약간,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본부장이 말했다.


"자, 그럼 한, 한 번... 우, 우리 회사의 새로운 꽃, 서연이 술잔 한 번 받아볼까?"


그때 갑자기 김과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러. 브. 샷!!! 러. 브. 샷!!!"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다른 직원들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김과장의 선창에 맞춰 복창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러. 브. 샷!!! 러. 브. 샷!!! 러. 브. 샷!!!"


마치,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맹수의 눈들처럼, 모든 눈이 서연에게로 향해 있었다.

술에 취한 본부장은 거의 반 강제적으로 서연의 팔을 꼬았고, 소주 한 잔을 원샷한 후, 남은 술을 머리에 털어 냈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이 입술로 나오지는 않았다. 회식은 마치 거대한 동물들의 집합소 같았다.


직장생활의 활력소가 아니라, 
욕망과 분노와 한숨이라는 배설물들이 
한 데 뒤섞인 거대한 공중 화장실 같았다.


하지만, 모두들 술에 취해 즐거워했다. 아니,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서연도 선배들이 주는 잔을 거절할 수 없어, 계속 마시다 보니, 맨 정신이 아니었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미나는 억지로 마시느라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2차는 노래방이었다. 술에 취한 영혼들의 안식처였다. 아니, 2차 배설구였다.

본부장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앉아 있던 팀장들은 노래방에서 그들의 권력을 드러냈다. 

그 희생양은 어김없이 미나와 서연이었고, 바람잡이는 김승규 과장이었다. 

가끔 드라마에서 파안대소를 하며 보던 그 장면이 서연의 삶에서 재방되고 있었다.

 김과장은 머리에 넥타이를 묶고서, 서연과 미나를 끌어당기고 있었고, 두 팀장은 서연과 미나의 손을 잡고 허리를 감싼 채, 부루스를 추고 있었다. 귓속말로 직장 생활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 얘기하라고 했다.


'야, 이 XX야. 지금이 불편하다'


하마터면 술에 취한 서연이 육두문자를 날릴 뻔했다.

난리 부루스의 회식 현장이었다.


이런 광경을 부담스러워하는 선배들도 꽤 있었지만, 권력의 힘에 눌려 그저 적당하게 맞장구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타인의 성희롱 따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듯, 눈치를 봐서 빠져나가는 선배들도 많았다.   

서연의 팀장인 김팀장도 마치 이 모든 상황들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자리를 떠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회생활의 첫날. 술과 성적 농담과 저급한 위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진 날이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뻔한 결말.


서연은 같은 신입사원인 미나가 안쓰러웠다. 워낙 곱게 자란 친구인 데다가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착한 친구였다. 하지만, 적자생존이 유일한 목적인 동물의 왕국에서 그러한 미나의 착한 성품은 하이에나 같은 저급한 인간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동물들은 약한 존재를 골라 괴롭힌다. 
미나는 그들의, 직장생활의 활력소였다.


바보같이 미나는 화를 내지도 못했다.


"어이, 미나씨, 오늘 옷, 죽이는데... 미나씨 다리가 이렇게 예뻤나? 오늘 처음 알았네..."

"아, 예, 예... 감, 감사합니다"


그들은 성희롱을 칭찬으로 착각했고, 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연은 그런 미나가 답답했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 미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미나씨, 왜 참아요?"

"아, 서연씨. 무슨 말씀인지..."


"아니, 남자 직원들이 몸매 얘기하거나 그러면, 한 마디 해야지, 왜 참냐고요? 보는 제가 다 화가 나요..."

"그러게요. 저도 참 제가 한심해요. 근데 천성이 그래요. 화 같은 거 잘 못 내요. 제가 좀 참으면 되죠, 뭐..."


그렇게 참고 참던 미나는 결국 2년 전 퇴사했다. 같은 팀의 정대리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났다.

그러더니, 미나가 야한 옷을 입고 그 순진한 남자 대리를 꼬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카톡방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나를 술자리의 안주처럼 씹어댔다.

세 사람만 우겨 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미나는 옷을 좀 짧게 입었을 뿐이었고, 남자들의 저급한 농담을 그저 웃으며, 받아주었을 뿐이었다.

같은 팀의 정대리가 한 번 보자고 해서 커피숍에서 만났을 뿐이었고, 정대리에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짝사랑에 배신당한 정대리는 동네방네 미나씨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미나가 누구랑 모텔에 같이 가는 것도 목격했다는 등, 지질함의 끝을 보여 주었다.


꽃뱀일 거라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이 미나씨를 둘러쌌고, 온실 속의 화초같이 자랐던 미나씨는 결국 그 거짓의 힘에 굴복해, 퇴사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미나씨, 저도 미나씨랑 다른 게 없네요... 저 시답잖은 농담을 그냥 받아넘기고 있으니 말이죠...'


서연도 그랬다. 김승규 과장의 저급한 농담을 그저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연간 한 번은 실시해야 하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은 형식적이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3조(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등)-2018.5.29. 시행 법률 기준] 
①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을 예방하고 근로자가 안전한 근로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직장 내 성희롱의 예방을 위한 교육(이하 "성희롱 예방 교육"이라 한다)을 매년 실시하여야 한다. (-> 위반시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② 사업주 및 근로자는 제1항에 따른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아야 한다.
③ 사업주는 성희롱 예방 교육의 내용을 근로자가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장소에 항상 게시하거나 갖추어 두어 근로자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 위반시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회사는 성희롱 교육에 관련된 비디오를 하나 틀어 주었다. 비디오를 본 후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았다는 서명을 했다. 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가 이어졌고, 대리출석이 빈번했다. 회사는 그걸 묵인했다. 교육내용도 유치했다. 실효성도 없었다.

성희롱은 회사의 문화였고, 모든 직원들이 그 문화 속에 젖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데, 
성희롱은 침묵 속에 자라 가는 나무, 같았다.


'그런 가벼운 성적 농담이야 직장생활의 활력소, 아닌가? 너무 민감한 직원들이 문제지...', 라는 생각이 회사 내에 팽배했다.


어떤 직원도 이런 성희롱이 법대로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남녀평등은 법전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고, 
성희롱이라는 실재는 권력과 현실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갔다.


사실 서연은 김과장이 조금 심한 것 아니냐며, 팀장에게 애로사항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팀장님, 이런 말씀 조심스럽지만... 김과장님,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몸매 얘기도 너무 자주 하고, 가끔씩 근육 풀어 준다고 목이나 어깨도 만지고, 애인 있냐고 자꾸 묻기도 하고... 이거, 성희롱, 아닌가요?"


은, 성희롱 행위자에 대해 회사가 징계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두고 있다. 이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형사처벌을 할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4조(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조치)-2018.5.29. 시행 법률 기준]

① 누구든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 그 사실을 해당 사업주에게 신고할 수 있다.

② 사업주는 제1항에 따른 신고를 받거나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에는 지체 없이 그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이하 "피해근로자등"이라 한다)가 조사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 등을 느끼지 아니하도록 하여야 한다.(-> 조사를 하지 아니한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③ 사업주는 제2항에 따른 조사 기간 동안 피해근로자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해당 피해근로자등에 대하여 근무장소의 변경,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업주는 피해근로자등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④ 사업주는 제2항에 따른 조사 결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이 확인된 때에는 피해근로자가 요청하면 근무장소의 변경, 배치전환,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아니한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⑤ 사업주는 제2항에 따른 조사 결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이 확인된 때에는 지체 없이 직장 내 성희롱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하여 징계, 근무장소의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업주는 징계 등의 조치를 하기 전에 그 조치에 대하여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입은 근로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아니한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⑥ 사업주는 성희롱 발생 사실을 신고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등에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위반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1. 파면, 해임, 해고, 그 밖에 신분상실에 해당하는 불이익 조치
2. 징계, 정직, 감봉, 강등, 승진 제한 등 부당한 인사조치
3. 직무 미부여, 직무 재배치, 그 밖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인사조치
4. 성과평가 또는 동료평가 등에서 차별이나 그에 따른 임금 또는 상여금 등의 차별 지급
5. 직업능력 개발 및 향상을 위한 교육훈련 기회의 제한
6. 집단 따돌림, 폭행 또는 폭언 등 정신적ㆍ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를 하거나 그 행위의 발생을 방치하는 행위
7. 그 밖에 신고를 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등의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처우

⑦ 제2항에 따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조사한 사람, 조사 내용을 보고 받은 사람 또는 그 밖에 조사 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해당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근로자등의 의사에 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조사와 관련된 내용을 사업주에게 보고하거나 관계 기관의 요청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서연은 법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팀장이 최소한의 액션은 취해주리라 기대했다.


팀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박주임. 그거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 적 있어?"

"네? 아, 아뇨... 지금 팀장님께 처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 마. 내 선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명심해. 다른 팀 사람들에게는 그런 얘기, 하지 마. 알았지?"

"네. 네..."


팀장은 자기가 관리를 잘못해서 부하직원이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그저 달래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여성 팀장의 마인드가 이 정도니, 다른 팀의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다만, 팀장이 인사팀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 다음 해엔 성희롱예방교육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신에 전문강사를 불렀다. 비디오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성희롱은 피해자의 주관적 관점이 중요합니다. 가해자가 아무리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피해자가 성적인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몸매가 좋다고 얘기하는 언어적 성희롱, 몸을 만지거나 하는 육체적 성희롱, 이상한 그림을 메일로 전송하는 시각적 성희롱 모두,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평등에 대한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피해를 당한 근로자가 회사에 얘기하면, 회사는 조사를 해서 행위자에게 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성희롱이 심하게 반복적으로 행해지면 징계해고도 정당하다는 판례가 있습니다(대법원 2008.07.10. 선고 2007두22498 판결). 그리고 피해를 입은 근로자에 대해 회사가 불리한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받는 상황은 없어야 하니까요..."


'그럼, 사장이 성희롱을 하면 어떻게 하나요?'라고 서연은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닫았다. 

돌아올 대답이 뻔했다. 

강사야 어쩔 수 없이 "성희롱이 사내에서 해결이 안 되면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할 수도 있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라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할 것이고, 교과서에 따라 행동한 서연은 교과서의 비현실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희롱을 한 가해자의 잘못은 스멀스멀 희미하게 사라져 갈 것이다. 


결국 피해자가... 


왜 그런 짧은 옷을 입었는지, 
왜 그런 저급한 농담에 웃어 주었는지, 
왜 함께 술을 마셨는지, 
왜 둘만 따로 만났는지,  
왜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서야 문제를 제기하는지, 
왜 회사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지...


본질이 아닌 것들만 최종 질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항상 그래 왔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는 꽃뱀으로 전락한다.


 지나간 굵직굵직한 성희롱 사건은 가해자의 이름이 아닌, 피해자의 이름으로 각인돼 있다.


피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권력자의 관점으로 
성희롱 사건은 재해석될 게 뻔했다.   


교과서의 모범 답안을 따랐다가 오히려 회사에서 불이익을 본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는 하는 건지... 서연은 비관적이었다. 

현실은 교과서의 세계가 아니라, 치열한 격투기가 벌어지는 팔각 링, 옥타곤의 세계였다. 

성희롱은 사실상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지질한 권력의 문제였다. 

팀장도 남자인 부하직원에게 은근슬쩍 성적인 발언을 할 때가 있었다. 문제는 팀장에게 '그거 성희롱입니다'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나의 칸막이 속에 갇혀 있는 권력도 그 안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이었다.  

물론 서연도 알고 있다. 매너가 좋은 동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한두 명의 미꾸라지만으로도
얼마든지 농도가 짙은 흙탕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나마 사회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언론도 조금씩 성희롱의 심각성을 다루기 시작했다.

술에 대해 관대한 문화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김승규 과장은 건재했다.

여전히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내 조카처럼, 내 딸처럼 보여서 그런 건데 뭐..."


 서연은 속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딸도 아니고, 
당신의 조카도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변태가 아니고
내 삼촌은 동물이 아닙니다


제9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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