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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Jun 24. 2018

작은 것이 아름답다?

노동법이 사라진 세계, 4명 이하 사업장


노동의 법전에서 깊이 가라앉아 있던 4라는 숫자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예전엔 왜 이 내용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노동법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감이 분명한 숫자였지만 한신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현실과 무관한 숫자였다.


현실과 조우하지 못한 지식은 잠시 기억의 저장소에 머물다, 이내 소멸해 버렸다.




11개월의 계약기간이 끝났다. 회사는 한신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도, 소용없었다. 온갖 유력 인사들의 도련님들로 가득 차 있는 회사에서 한신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다.      

“한신씨, 그동안 고마웠어요. 계속 같이 일했으면 좋겠는데, 미안해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소소한 팀장의 위로가 고마웠다. 사실 팀장은 한신을 정규직원으로 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내려온 낙하산이 팀장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낙하산이 그나마 비어 있던 한 자리마저 덮쳐 버렸다.      

그저 하루 지나면 없어질, 계약직 노동자의 초라한 체취만 남았다. 한신은  깔끔하게 책상을 정리했다. 출입증 카드도 반납했다.  팀장과 팀원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수고했어, 라는 영혼 없는 멘트가 들렸다. 회사의 회전문을 빠져나왔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인생이 돌아가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해고를 편애했다. 해고를 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해고를 하기 위해서 30일 전에 미리 예고를 해야 하고, 해고는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고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기간 만료 따위는 마치 버린 자식처럼 취급했다. 그냥 기간이 끝났을 뿐이었다. 예고를 할 의무도 없었고 서면으로 통지할 의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왜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것인지, 회사가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2년을 초과하면 무기계약직으로 본다는 조항만이 덩그러니 남아, 현실을 조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신은 최대 120일간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다. 상대성이론의 진리를 입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실제의 물리적인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시간이 흘러갔다.




한신은 한 작은 출판사에 취업했다. 민주는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할수록 현실은  더욱 무거워져 갔다. 때론 생각조차 비워야 했다.

지인이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사장을 제외하면 3명이 근무하고 있는 소규모 출판사였다. 기획을 담당하는 부장이 있었고, 편집자가 1명, 디자인 담당자가 1명이 있었다. 한신은 홍보와 마케팅을 맡았다.


책도 좋았고, 출판사의 일도 나름 적성에 맞았다. 동료들도 책에 대한 사명감이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다들 성격이 좋아 보였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게 너무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다른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가치였다. 회사가 망할라치면 사명감 따위 내려놓고 팔릴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했다. 좋은 책이란 많이 팔리는 책이었다.

월급이 하루 늦게 나오자 그 선한 동료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가난은 사람의 성격마저 바꿀 수 있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한신은 소규모 사업장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서너 명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삶의 철학을 공유하는 화목한 가정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한 눈을 팔았다간 어디에서 날아온지도 모르는 총탄에 죽을 수도 있는, 최전방의 치열한 전장이었다. 살기 위해 사장은 인건비를 줄여야 했고, 살기 위해 직원들은 한 푼의 돈이라도 받아 내야 했다.


투박하지만, 예리한 계급의식이
이 작은 10평짜리 공간에서 은밀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함께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며, 같은 운명공동체라 말하며 함께 웃으며 밥을 먹었다. 하지만, 사장은 사장이었고 노동자는 노동자였다. 그 근본적인 존재의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올해 초에 출간한 두 개의 책이 꽤 입소문이 났다. 회사의 재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마케팅을 조금만 더 하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책이 꽤 매출이 괜찮은데, 한두 명만 더 마케팅 인력으로 채용하면 어떨까요? SNS에 홍보할 수 있는 알바도 좋고요..."


부장은 한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한신 과장님. 우리 사업장 근로자 티오는 4명입니다. 더 이상 채용하진 않을 거예요. 그게 사장님 방침이기도 하고요..."


티오가 4명이라는 부장의 말을 듣는 순간, 오래전에 보았던 숫자 4의 잔상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4명 이하 사업장의 노동시간 


모든 업종이 그러하듯이 마감일을 앞둔 사무실은 거대한 5일장이 열린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전화기 속 목소리의 데시벨이 두 배이상 올라갔고,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는 속도도 두 배 이상 빨라졌다. 반면에 노동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마감일을 앞둔 어느 늦은 밤, 한신은 건물의 1층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10시 뉴스가 들려왔다.


2018년 7월 1일부터 근로자가 300명 이상 되는 사업장은 1주 40시간을 기준으로 휴일 포함 1주 12시간까지만 연장근로를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50명 이상 되는 사업장은 2020년 1월 1일부터, 5명 이상 되는 사업장은 2021년 7월 1일부터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시행된다고 했다. 앵커는 "이제 워라벨로 가는 첫 단추가 꿰어졌습니다"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 앵커의 설명 속에 4명 이하 사업장은 빠져 있었다. 몇 년 동안 논쟁하던, 그 떠들썩한 법 개정의 자리에 노동수가 4명 이하 사업장이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4명 이하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1주 40시간이라는 법정 노동시간은 4명 이하 사업장과는 무관한,
외계에서 온 시간이었다.


1주 12시간이라는 연장근로시간의 한계도 4명 이하 사업장에서는 무의미했다. 법상으론 무제한 노동이 가능했다. 약 350만 명의 노동자들이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노동시간과는 무관한 삶의 영역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었다. 한신의 사무실 지하 1층의 김밥나라는 24시간 불을 밝혔다. 4명의 노동자로 출판사업을 하고 있는 북스 출판사도 마감일이 다가오자, 새벽까지 불을 밝히고 김밥나라에서 야식을 먹었다. 힘겨운 사업장들의 힘겨운 공존이었다.  

4명 이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워라벨이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다. 일과 삶의 균형은 적어도 4명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사치라고,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만들어진 노동법이 이렇게 차가울 수도 있구나, 한신은 생각했다.


한신은 노동법의 민낯이 낯설었다. 무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4명 이하 영세 사업장에서는 과로가 합법이었다.




4명 이하 사업장의 연장·야간·휴일근로


연장근로(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초과한 근로), 야간근로(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의 근로), 휴일근로를 한 경우 통상임금의 50%를 추가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도 4명 이하 사업장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른바 곱하기 1.5가 공중에서 인수 분해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하더라도, 아무리 밤에 일을 하더라도, 아무리 휴일에 일을 하더라도 가산임금이 지급되지는 않았다. 그냥 곱하기 1.0이었다.


0.5의 권리가 4명 이하 사업장에서는 분해되고 소멸되었다.

법정공휴일도 늦어도 2022년 1월 1일부터는 유급휴일이 된다. 하지만, 4명 이하 사업장은 법정공휴일을 휴일로 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한신 과장님, 우리같이 조그마한 회사가 쉴 것 다 쉬고,  그런 가산임금까지 지급하면 버틸 수 있겠어요? 힘들지만, 일단은 회사가 살아야지요..."


부장이 건물 밖 흡연공간에서 담배 연기를 후, 하고 공중에 날려 보내면서 한신에게 말했다. 생존만이 최고의 가치인 영세업체 사업체에서 노동인권의 가치는 저 담배연기처럼 공중에서 쉬 흩어지고 사라져 갔다.  




4명 이하 사업장의 연차휴가


매년 최소 15일에서 최대 25일이 부여되는 연차휴가도 4명 이하 사업장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은 쉼의 권리, 휴식권조차 차별했다. 근로기준법은, 다 생존을 위한 거야, 라며 영업체 노동자를 달래고 있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있는데, 근로기준법은 4명 이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존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영세업체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무 대안도 없이 노동법의 온갖 보호조항에서 제외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한신은 답답했다.


4명 이하 사업장의 해고


"한신씨, 어때요? 일은 할 만 해요?"


서연이 오랜만에 민주를 보러 집에 들렀다.

둘째 아이마저 유산하고 서연은 이혼했다.


"유서깊은 가문이란게 별거 아니더라고요. 남자 아이를 낳아주는 게 제 존재 이유였어요"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한숨 소리가 집안의 구석구석에 새겨졌다. 남편도 딱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한숨소리의 숫자와 크기를 서연은 감당할 수 없었다.


서연의 존대는 낯설었다. 하지만 민주와 결혼한 이후, 서연은 한신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게 예의라 생각했다. 한신은 뭔가 불편했지만, 딱히 무어라 요구하기도 애매했다.


"한신씨는 책 좋아하니까, 그런 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제가 옛날에 참 많이 배웠는데..."


서연은 말끝을  흐렸다. 과거와 다른 본인을 직시하는게 두려워서였을까.


"우리 팀 동료 한 명이 해고를 당했는데,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어요.  저한테 도와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네요. 혼자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직장이라도 붙어 있어야죠."


서연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옳음과 그름을 알면서도 옮음을 선택할 수 없는, 자괴감이 그 눈빛 속에 담겨 있었다.


"제가 다니는 곳은 부당해고 당해도 어디 호소할 곳도 없어요"


한신이 말을 돌렸다.


"왜요? 노동위원회, 가면 되잖아요?"


서연이 예전의 그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한신에게 물었다.


"노동자수가 5명이 안되는 사업장은 노동위원회에 가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할 수가 없어요. 노동위원회는 5명 이상의 사업장에만 문을 열어 놓았어요.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거죠. 법원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이 그만한 여력이 있겠어요? 해고를 서면으로 통지하지 않아도 되고요."

"아, 그러면 해고에 대한 조항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 건가요?"

"해고를 하려면 30일전까지 예고하라는 조항이나, 출산휴가기간에는해고할 수 없다는 조항은 적용돼요."

"아, 예고를 하지 않고 바로 해고하면 해고예고수당은 줘야 되는 거군요?"

"그렇긴 한데, 법전에만 등장하는 신기루 같은 거죠, 뭐...사실상 부당한 해고에  대해 구제신청을 못하니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그래도 유급주휴일, 퇴직급여, 그리고 휴게시간은 적용되니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사장님들이야 그마저도 없애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말이죠."




요즘은 항상 그랬다. 한신의 눈은 매일 벌겋게 충혈돼 있었고 머릿속은 온갖 복잡한 생각들로 엉클어져 있었다. 4명 이하 사업장의 노동자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덮여있는 것 같았다.


노동법을 잃어버린 세계였다.


그 회색의 세계에서 한신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제21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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