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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Jul 04. 2018

우리는 보이지도 않나요?

초단시간 노동자의 노동법

"여보. 내가 언제 대학 들어갔는지 알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2년 뒤에 대학에 들어갔어. 치사하고 더러워서..."

"갑자기 안 하던 옛날 얘기를 다하고... 많이 힘들어?"


잠이 오지 않을 때 침대는 조그마한 고해성사실이 되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가 되기도 한다.


 마주 보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얘기도 독백하듯  하게 된다. 눈이 천장을 향해 있으니 쓸데없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특성화고 졸업하고 조그마한 제조업체에 취업했어. 내 힘으로 번 돈을 만질  때, 그 돈의 촉감이 참 좋았어.  친구들, 대학 가서 공부할 때 난 벌써 어른이 된 것  같았거든..."

"..."

"대학 나온 친구들보다 월급이 적어서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야. 뭐랄까. 사람들이 날 무시하는 느낌이었어.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어. 대학도 안 가고 뭐했냐고 하더라. 술자리에서. 취중진담이라고, 거기서 결심했어. 대학에 가야겠다고."


민주는 한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신은 옛날 얘길 하는 걸 싫어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어머니와 이혼했다는 걸 결혼하기 며칠 전에야 알았을 정도다. 어머니와 힘들게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상처가 많은 사람이란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밝았고, 정의롭고, 용감했다. 무엇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상처가 지혜로 승화한 것일지 모른다고, 민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한신은 약해 보였다. 두려워 보였다. 어쩌면 과거의 상처가 치유된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민주는 생각했다.


한신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눈을 조용히 감고서 말을 이어갔다.


"대학 다닐 돈이 있어야 말이지. 장학금이 나와도 학비는 감당을 못하겠더라. 야간에도 일을 했고, 주말에도 일을 했어. 진짜 천사같이 좋은 사장도 만나 봤고,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사장도 만나 봤어. 성실한 동료도 있었고, 당일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만둔 무책임한 동료도 있었어. 세상은 참 요지경이더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더라고..."


한신의 과거가 아프다기보단 한신의 말문이 열린 게 기뻤다. 요즘은 한신이 너무 피곤해서인지 말 한마디 주고받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 다닐 때, 광용 시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주말 알바로 근무를 했었어. 계약서가 독특했지. 토요일에는 8시간 일을 했고, 일요일에는 6시간 일을 했어. 그때는 몰랐어. 왜 근무시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나중에야 알았지. 그 이유를..."

"초단시간 근로계약을 체결한 거구나... "


한신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증거라도 제출하듯이 민주가 한 마디를 보탰다.


"응. 나 바로 앞에 근무한 알바 형님하고는 토요일 8시간, 일요일 8시간 계약을 체결했대. 한 2년 정도 알바를 꾸준하게 했다는데, 군대를 가면서 퇴직금도 청구하고, 주휴수당도 청구를 했대."

"한 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이상이면, 퇴직금도 줘야 하고, 주휴수당도 줘야 하는 거, 맞잖아?"

"그렇지. 그런데, 도서관에서 알바 인건비를 관리하는 공무원이 몰랐나 봐. 퇴직금이나 주휴수당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그 형이 노동부에 가서 임금체불로 진정서를 제출했어. 당연히 퇴직금도 지급하고 주휴수당도 지급하라고 시정지시가 떨어진 거지... 그다음부터 주말에 근무하는 알바들 계약서를 다 바꿨대. 1주 14시간으로 말이야."


근로계약서에 1주 근로시간이 15시간으로 적혀 있는 것과 14시간, 혹은 14시간 30분으로 적혀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단지 1시간이나 30분의 격차가 아니었다.  


1주 노동시간이 15시간 미만인 노동자에게는 퇴직급여를 지급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계속 일한 기간이 1년 이상이 되었더라도 퇴직금을 청구할 수 없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4조)

그리고, 주휴수당을 지급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1주일의 소정근로일수를 개근했더라도 하루치의 주휴수당을 청구할 수 없었다. (근로기준법 제18조 3항 및 제55조)

근속기간이 1년 미만인 노동자는 한 달을 개근할 경우 한 달에 1일씩, 근속기간이 1년 이상인 노동자는 1년간 80% 이상 출근한 경우에 연 15일 이상의 유급연차휴가를 부여해야 하지만, 1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노동자에게는 연차휴가를 부여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근로기준법 제18조 3항 및 60조)

무기계약직이 될 기회도 박탈했다. 기간제 노동자가 2년을 초과해서 근무할 경우 무기계약직으로 간주된다는 조항은, 1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조 1항 6호)

사회보험도 산재보험을 제외하곤 가입 신고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단, 고용보험의 경우 초단시간근로자라 하더라도 3개월 이상 근로하는 경우에는 가입신고를 해야 한다)


고작 30분이 모자랄 뿐이었지만, 그 노동시간의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인건비의 절감 효과를 무시할 수 있는 사업주는 많지 않았다.


초단시간 노동자의 비율은 누룩처럼 부풀어져 갔다.


그나마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조항은 적용됐다. 밥 먹을 시간은 가질 수 있었다. 초단시간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근로계약서는 작성해야 하고, 연장근로를 하면 연장근로수당도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사업장이 부지기수였다. 노동법은 그저 딴 나라 법이었고, 밥이 법을 이기는 사업장들이 수두룩했다.


인간의 권리, 인권이... 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삭제되고 있었다.  
인권마저 이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도서관에서 난,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야. 1주에 14시간을 노동하는 초단시간 노동자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어. 최저임금하고 산재보험 정도만 잘 챙기면, 다른 건 신경 쓸 것도 없었지. 인권이라고 얘기하기도 민망한 존재였어. 뭐가 있어야 얘기라도 하지..."

"그래도 당신은 약자에 대한 관심을 배웠잖아. 지금 당장이라도 가볍게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말이야..."

"그런가?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내가 주는 관심보다 법조항이라도 하나 더 바꿔 주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직장이 폐업한 이후, 한신은 부쩍 과거가 많이 떠올랐다. 조그마한 출판사지만 정 붙이며 근무해야지, 생각하다가도 문득문득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다시 초단시간 노동자로 근무하던 대학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돌아도 돌아도 원점이었다.


"여보, 우리 함께 이겨 나가자. 우리 아직, 젊잖아..."


민주가 팔짱을 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변한 것도 있었다. 옆에 누워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유일한 내 편, 민주가 있다는 것, 독립할 때까지 책임져야 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아이들이 똘똘한 눈망울로 한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사람이 먼저인 삶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값진 것들이 여전히 한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신은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을 꾸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꿈을...


제22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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