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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Jul 07. 2018

시간과 임금의 딜레마

1주는 7일이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민주는 동기 중에서 가장 빨리 과장 타이틀을 취득했다. 가부장적인 풍토가 남아있는 회사에서 여성, 그것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까지 갔다 온 여성노동자가 제 시기에 승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 경쟁자를 제외하곤 과장 승진에 토를 다는 동료들이 없었다. 그만큼 민주의 능력은 탁월했다. 기획력이나 페이퍼 작성 능력은 팀장조차도 감탄할 정도였다.


"어이, 이과장, 축하해. 내가 신경 써준 건 알고 있는 거지?"


박팀장은 승진에서 탈락한 정대리 앞에서는 위로의 말을 건넸고, 민주의 앞에서는 은근히 공치사를 해댔다.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게 여러 부하직원을 둔 상사의 운명 같은 게 아닐까,라고 민주는 생각했다. 팀장이 민주를 특별히 추천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 잘하는 부하직원에 대한 특별관리 같은 거라고나 할까.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사내 정치... 뭐, 그런 거였다.

승진 인사발령이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되어 있는 5단계 직급체계를 내후년부터 사원-선임-책임이라는 3단계 직급체계로 단순화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인사가 5단계 직급 체계에서의 마지막 인사발령이었다. 과장이라는 직급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기뻤다. 다른 직원들이 과장님, 이라고 불러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권력과 명예를 그냥 주는 회사는 없었다.


과장 타이틀을 달자마자, 마치 막혀 있던 둑이 터진 것처럼 민주에게 일감들이 밀려들었다.


"이 과장. 이제 우리도 근로시간을 좀 정비해야 할 것 같아."

"아, 근로시간 단축 관련해서요?"

"그렇지. 우리 회사가 한 주 40시간에다가 12시간 연장근로가 바로 적용되는 회사잖아. 다른 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영업팀이나 해외판촉팀은 아직도 다른 회사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야. 커피타임이나 퇴근시간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이제 제도화해야 하고. 여기, 이건 김과장이 만든 자료야. 참조해"

"언제까지 보고 드리면 될까요?"

"ASAP(as soon as possible : 가능한 한 빨리)으로, 그리고 CC(메일을 보낼 때 수신인 이외의 참조인)는 넣지 말고 바로 나한테 넘겨줘. 알고 있지? 중요한 거니까, 대외비 유지하고."   

"네, 알겠습니다."


박팀장은 김과장을 믿지 못했다. 김과장이 만든 페이퍼를 보니, 팀장이 이해가 되었다. 김과장의 역량으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뀐 근로기준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이 안 된 페이퍼였다. 1주의 의미도, 법정근로시간의 의미도 모른 채, 페이퍼는 여러 신문기사를 요약해 놓은 듯 뒤죽박죽이었다. 혹 김과장도 낙하산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보고서였다. 이걸로 보고를 했다간 박팀장이 이사에게 깨질게 뻔했다. 김과장이 기분 나빠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팀장은, 이제 막 과장 직급을 얻은 민주에게 이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근로기준법 제2조(정의)]
7. "1주"란 휴일을 포함한 7일을 말한다.

1주가 7일이란 건 초등학생도 알 텐데... 민주는 냉소적인 웃음을 법조문에 날려 보냈다.   

1주가 7일이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사실을 법조문으로 집어 놓은 건 노동부의 원죄 때문이었다. 노동부는 개정된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1주를 5일(정확히는 휴일을 제외한 소정근로일수)이라고 해석했다. 사실상 장시간 노동에게 면죄부를 주는 해석이었다.


근로기준법은 1주에 12시간을 한도로 연장 근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53조(연장 근로의 제한)]
① 당사자 간에 합의하면 1주 간에 12시간을 한도로 제50조의 근로시간(*40시간을 의미함)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1주를 5일로 해석하게 되면 1주에 12시간 연장근로와는 별개로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휴일근로가 가능해진다. 1주(5일)의 근로시간은 40시간이고 1주(5일)에 12시간까지 연장근로를 할 수 있으므로, 1주(5일)의 바깥에서, 휴일로 지정되어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별도의 휴일근로가 가능하다고 해석한 것이다. 노동부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주 근로시간 최대한도는 68시간이다. [68시간 = (5일) 법정 40시간 + (5일) 연장 12시간 +(토요일) 휴일 8시간 + (일요일) 휴일 8시간]


노동부가 1주의 의미를 5일로 해석하자, 우리나라는 곧바로 1주 노동시간 68시간의 나라가 되었다. 장시간 노동을 통한 생산성 확보가 우리 노동현장의 철학이 되었다.


68시간이 사실상 기본노동시간으로 변질되었고,
연장근로수당은 노동자의 기본급이 되어 버렸다.


연장근로를 하지 않으면 임금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노동조합이 연장근로를 사용자에게 채근하는, 황당한 상황도 벌어졌다. 시간과 임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관계였고, 단순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함수와도 같았다.


2018년 7월 1일부터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에선, 1주가 휴일을 포함해서 7일이 된다.


1. 상시 30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 2018년 7월 1일
2. 상시 50명 이상 300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 2020년 1월 1일
3. 상시 5명 이상 50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 2021년 7월 1일


거기에 따라서 최장 근로시간도 68시간이 아니라 52시간이 된다. (52시간 = (7일) 법정 40시간 + (7일) 연장 12시간]

52시간을 넘겨서 근로를 시킨 사용자에게는 법상으로는 2년 이하의 징역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벌칙조항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의 회사도 시간과 임금이라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함수관계를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사무실 앞에는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이라는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야, 저것들, 물 만났네, 물 만났어. 일을 적게 하면 임금도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지, 저게 말이야, 된장이야?"


회의실로 이동하는 도중에 인사노무 담당 이사가 박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동조합의 입장 따윈 무시하라는 말이었다.




"사실상 영업팀 임금은 한 주 60시간 베이스로 설계돼 있습니다. 한 주 52시간 베이스로 임금체계를 설계하면, 한 주에 8시간, 한 달로 따지면 약 32시간분의 임금 삭감이 예상됩니다."

"그러면, 임금이 얼마나 다운되는 거지?"

"직급이나 호봉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한 달에 50만원 정도 떨어질 것 같습니다."

"음... 뭐, 내가 영업팀 직원이라도 따질만하네. 그지?"

"네, 이미 생활패턴이 60시간치 임금에 맞춰져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응?"

"52시간에 맞추려면, 바이어 접대하는 시간도 근로시간에서 빼야 합니다. 영업팀장에게 접대 시간은 업무지시를 하거나 결재를 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줘야 합니다. 그건 팀장님께서 좀 얘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 허팀장, 또 부하직원들 있는 데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겠군. 나는 할 만큼 했다, 보여줘야 할 테니까..."


박팀장은 평소보다 2초, 3초 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우리 팀만 엄청 욕 들어먹게 생겼네. 뭐, 그게 인사팀의 숙명이지만 말이야..."

"그럼, 그냥 이렇게 기안 올릴까요? 연장근로 12시간으로 하고, 연장근로 감소분은 회사가 보전해줄 의무가 없으므로, 보전해주지 않는 걸로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 아, 보전이라는 용어는 쓰지 마. 연장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임금 안 주는 게 당연한 거니까... 법에 맞춰 근로시간 운영하고 법적으로 정확하게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는 거야. 괜히 이상한 말 썼다간  우리만 욕먹어. 그냥 문장 조금만 더 가다듬고, 예상 임금 감소분 좀 더 정확하게 계산해서 다시 한번 보자.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마찰음이 들려왔다. 저 멀리서 영업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박팀장, 영업해 봤어? 바이어 접대 안 하고, 영업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뭐? 그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까, 결재하지 말라고? 지금 장사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해외 영업팀은 또 어떻게 할 거냐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페이퍼만 작성하고 있으니까, 영업팀이 우습게 보이는 거야. 뭐야?"


그걸로 끝이었다. 부하직원에게 보여주기 위한 면피용 멘트였을 뿐이다. 허팀장도 임원들 앞에선 입에 자물쇠라도 걸어 잠근 듯, 불만을 속으로만 삭일 뿐이었다.




우리 사회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껍질을 깨기 위한 조그마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민주는 데미안(헤르만 헤세 지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민주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래.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야 해. 상처를 입겠지. 두렵기도 하겠지. 그냥 껍질 속에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후회도 들겠지. 차라리 장시간 노동을 하며 임금 더 받는 게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도 남겠지. 하긴...줄어든 시간만큼 임금을 보전해 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 회사 정도면, 해줄 수도 있지 않나?'


논리도, 맥락도 없는 생각들이 민주의 뇌 구석구석을 자극하고 있었다. 민주는 혼란스러웠다. 그 혼동의 한가운데에 자신이 있다는 게 싫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그저 팀장의 지시에 따라 예쁜 기안문을 찍어낼 뿐이었다. 남편의 일자리마저 불안정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역사의 큰 줄기를 바꿀 수는 없을 거야. 그나저나 이런 큰 흐름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민주도 박팀장처럼 평소보다 약 2,3초 긴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걸어갔다.

그 긴 한숨소리만큼 민주의 생각도 길어지고 있었다.

하루가 길었다.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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