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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Jul 13. 2018

DC? 퇴직금, 할인하는 건가요?

퇴직연금제도

“위원장님, 어제 저 실수한 거 없죠? 죄송해요. 제가 술이 많이 취해서...”     


민재가 말했다.      


“난, 네가 그렇게 눈물이 많은 줄 몰랐다. 기억나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었던 거...”     


민재는 멋쩍게 웃었다. 문기는 민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위로했다.      


“오늘도 힘내자.”     


못은 빠져도 못 자국은 남아 있는 법이다.      


민재의 눈물은 그 못 자국에 고여 있는 고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제 문기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깊숙한 곳에서 홀로 세상과 독대하고 있던, 민재의 상처를 보았다. 민재뿐이랴. 군데군데 못 자국이 남아 있는,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저 차갑고 외로운 회사의 정문을 오고 가고 있었다. 가끔씩 얼굴에 비치는 옅은 미소가 오히려 슬퍼 보였다.      



     

“위원장님,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DC? DB?”     


얼큰한 해장국을 같이 먹던 민재가 문기에게 말했다.      

회사는 몇 년 전부터 퇴직금제도를 없애고, DB형 퇴직연금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지난주, 회사로부터 한 통의 공지 메일이 날아왔다.       


“근로기준법 개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회사의 실제 근로시간도 연장근로를 포함한 기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DB형인 경우,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퇴직 시 받게 될 퇴직연금 수령액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회사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32조에 따라 과반수 노동조합인 A노동조합의 대표와 협의하여 DB형 외에 DC형을 추가로 도입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DC형 퇴직연금제도로 전환하기를 원하는 직원들은 첨부한 서식을 작성하여 해당 팀장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타 사항들은 추후 다시 공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자들이 노동만 모르는 건 아니었다. 금융도 몰랐다.

학교에서 배웠던 수요공급의 법칙은 하루하루 워라밸을 꿈꾸며, 힘겹게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현장에서 바로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물을 알아야 했고, 금융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배운 적이 없었다.


노동법을 배운 적도 없었고, 금융경제를 배운 적도 없었다.
스스로 각자도생의 생존법을 터득해야 했다.


퇴직급여제도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담당자가 아닌 다음에야, DB나 DC를 알아야 할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위원장님, 얼핏 보니까, DB는 데이터베이스로 보이고, DC는 디스카운트로 보이네요. 퇴직금을 데이터베이스로 저장해 놓고, 나중에 할인, 들어가는 건가요? 크크크.”


민재는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퇴직금 제도는 퇴직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돈을 회사 내에서 적립하고 회사에서 지급하는 제도야. 퇴직금은, 1년 근무하면 한 달, 정확하게는 30일 치의 평균임금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지? 1일 평균임금은 퇴직하기 전 마지막 3개월을 가지고 계산하는 거고.”

“네, 그건 예전에 조합원 교육할 때, 들었어요. 그래서 퇴직을 앞둔 마지막 3개월에 너무 쉬지 말라고... 그런데, 우리 회사는 퇴직금이 아니라 퇴직연금이잖아요?”

“그렇지. 퇴직연금은 퇴직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돈을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해 두는 제도야. 그런데, 그 돈을 누구 명의로 적립을 하고, 누가 그 적립된 돈을 운용하는지에 따라서, DB형과 DC형으로 구분하고 있는 거야.”

“아이고,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옵니다요. 일단 밥부터 드시지요.”     


자기가 말을 먼저 꺼내 놓고, 자기가 말을 끊었다. 회사뿐 아니라 민재에게도, 법보다는 밥이 먼저였다.      




DB형 퇴직연금제도


DB형은 Defined Benefit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이라고 한다. 지급해야 할 퇴직급여의 액수는 퇴직금과 동일했다. 다만, 외부 금융기관에 회사의 명의로 돈을 적립하고, 회사가 그 돈을 운용한다는 점이 달랐다. 만약 운용을 잘못해서 퇴직금만큼의 금액이 확보되지 않으면, 추가적인 돈을 회사가 부담해야 했다.                                


<DB형 퇴직연금제도>


 “그런데 왜 회사에서는 DB형을 DC형으로 바꾼다고 하는 거죠? DB형을 유지하면, 적어도 퇴직금에서 받는 것만큼은 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회사가 운용을 잘못하더라도 그만큼은 받는 거니까, 노동자 입장에서는 안정적일 것 같은데요?”     


민재가 의아한 듯 문기에게 물었다.      


“맞아. DB형은 퇴직금에서 주는 액수만큼은 줘야 하니까, 꽤 안정적이긴 해. 그런데, 약점이 있어.”

“네, 그게 뭔데요?”

“퇴직금은 퇴직 전 3개월로 계산한다고 했잖아. 마지막 3개월 동안에 받은 임금이 줄어들면, 퇴직금도 줄어들 수 있어. DB형 퇴직연금도 똑같은 구조로 돼 있거든... 마지막 3개월 동안 68시간 일을 했으면 그만큼의 돈으로 퇴직금을 계산하지만, 52시간 일을 했으면 그만큼의 돈으로 퇴직금을 계산하는 거야. 근로기준법에서 최장 근로시간 한도를 68시간이 아니라, 52시간으로 개정을 했으니까, 사실은 그만큼의 특근수당도 줄어들 수 있다는 거지. 대기업이야 뭐, 그 돈을 보전해 주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리 회사는 그렇게 해 주지 않을 거야. 그럼 실제로 퇴직급여가 줄어들 수 있어.”     


근로시간이 단축되더라도 그 시간만큼 임금을 보전해 주거나, 임금인상률이 높은 사업장은 여전히 DB형 퇴직연금의 메리트가 컸다. 하지만, 임금인상률이 높지 않거나, 근로시간 단축이 예상되는 사업장은 DB형 퇴직연금이 DC형 퇴직연금에 비해 불리할 수도 있었다. 따져봐야 했다. 




DC형 퇴직연금제도


“DC형 퇴직연금을 선택하면, 민재 너도 투자에 대한 공부를 좀 하는 게 좋아.”

“예? 제가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DC형은 Defined Contribution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이라고 한다.

외부 금융기관에 근로자의 명의로 돈을 적립하고 그 적립금을 근로자가 운용해야 한다. 운용을 잘하면 수익이 날 수도 운용을 잘못하면 손실이 날 수도 있었다.

손실을 원치 않은 근로자들은 주로 확정이자형 상품에 투자했고, 좀 더 공격적인 투자를 원하는 근로자들은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했다.      


“회사는 연간 임금총액의 1/12에 대해서만 근로자 명의로 금융기관에 적립해 주면 돼. 나머지 손실과 수익에 대한 책임은 근로자가 지는 거야. 그래서, 민재 너도 투자에 대한 공부를 좀 하는 게 좋아.”                      


<DC형 퇴직연금제도>

                                              

“에이, 저는 그런 거 잘 모르니까, 확정이자형 상품에 투자할 거예요.”

“그래, 아무래도 안전한 상품을 많이 선택하긴 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그런데, 근로시간 단축시간만큼 임금을 보전해 주고 임금인상률도 높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투자하면 DB형보다 높은 금액을 받긴 힘들 거야.”

“예? 왜요?”

“생각을 해 봐. DB형은 마지막 3개월 동안에 받은 금액을 가지고 퇴직급여를 지급하는데, DC형은 매년 지급되는 금액을 가지고 지급해. 해마다 월급이 올라가는 것만큼 DC형의 수익이 높지 않으면 DB형보다 높은 금액을 받기는 어렵겠지... 게다가 현재 확정 이자율이 높지도 않고. 물론, 우리 회사처럼 쥐꼬리만큼 임금을 인상하고, 근로시간도 많이 단축되는 사업장은 DC형으로 하는 게 좋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우리 회사는 68시간 노동을 하다가 52시간으로 단축하니까, 퇴직급여액수가 다운될 수 있으니까, DC형으로 전환하라는 거군요?”

“그렇지. 그런데, DC형으로 바꾸면, 민재 네가 적립금을 운용을 해야 하니까, 너무 넋 놓고 있지는 말라는 거지. 아무리 확정이자형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네가 운용을 해야 하는 거니까, 금융상품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좀 가지고 있는 게 좋아.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야, 그런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야...”     




늦은 밤,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다, 문기는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자신도 10년, 20년 뒤의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미스트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었다.

민재도 마찬가지일 거다. 부끄러웠다.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온갖 잘난 척을 하며 투자를 하라느니, 공부를 하라느니, 꼰대 같은 소리를 해댄 것 같았다.

퇴직할 때, 과연 내 삶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문기는 생각했다.


저 수많은 아파트의 불빛 속에 내 이름으로 된 불빛 하나 가질 수 있을까.


지금 받고 있는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빌딩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뉴스전광판에선 서울 강남의 집값이 몇 억이 뛰었다가 몇 천만 원이 떨어졌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불로소득의 천국, 같았고, 그들만의 리그 같았다.      

여의도 공원의 한쪽에서는 ‘최저임금을 만원으로!’라는 피켓을 든 노동자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간 공원의 공터에서는, ‘소상공인 다 죽겠다, 최저임금 동결하라’는 피켓을 든 소상공인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대기업과 건물주의 탐욕에 대해서는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주고받고 있을 뿐이었다.      


제24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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