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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Nov 22. 2023

한국인은 이 동네에서 운전 못 합니다

차 없이는 집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미국 생활의 현실을 깨닫고 바로 합법적 운전면허 따기에 돌입했을 때다. 처음에는 1년간 쓸 수 있는 국제 면허증을 갖고 와서 쓰다가, 오랫동안 만료 걱정 없는 미국 운전 면허증을 받기로 했다. 단순히 운전 때문만이 아니라, 주민등록증 같은 게 없는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이 내 신분증을 대체하고 있다는 이유도 컸다. 마트에서 술 한 병 살 때도 정확한 나이를 확인시켜 줘야 하는데, 항시 여권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LA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은 미국에서 새로 면허증을 따려고 애를 먹었다고 했는데, 알아보니 다행히 내가 있는 남쪽에서는 다시 시험 볼 필요 없이 한국 면허증을 미국 면허증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글을 봤다. 영어로 필기, 실기 시험을 다시 칠 생각을 하면 그 또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데, 장롱면허라도 어릴 때 미리 따 두길 천만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덜렁 한국 면허증만 갖고 간다고 해서 바꿔주는 건 아니다. 영화 ‘주토피아’에서 미국 운전면허 공단 직원을 나무늘보로 표현한 만큼, DMV라 불리는 이 기관은 미국인들도 제일 싫어하는, 하지만 꼭 거쳐야 하는 엄청난 곳이라 하겠다. 나는 한국 대사관에 요청해, 기존의 내 운전면허증 공증 서류를 받았고, 또 내가 미국에 거주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입한 자동차 보험증도 준비했다. 그래도 불안해서, 지역 DMV에서 제일 직위가 높은 담당자를 찾아 면허증 교환이 가능한 건지 이메일까지 보내 답변을 받았다. 이 정도면 나름 철저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준비하고 예약도 잡고 갔건만, 그간의 준비가 무색하게 나는 입구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 입구에 있는 직원이 내가 내민 서류를 보자마자, 한국 면허증은 교환이 안 된다고 돌아가라 한 것이다. 


아니 영사관 공식 사이트에서도 확인했는데 이 직원은 무슨 증거로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진짜 면허 정책을 잘 알고 하는 말인지 의심이 됐다. 그리고 이 직원의 말만 듣고 돌아서기에는 내가 그간 준비한 노력과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프린트해서 가져간 DMV직원과의 이메일을 보여줬다. 당신 상사랑 메일로 연락했는데 교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종이를 들이밀고 나서야 겨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끝까지 그 직원은 일단 들어가서 번호표를 받게는 해주겠지만, 교환이 안 될 수도 있으니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안 그래도 불안했던 마음이 더욱 흔들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번호가 전광판에 뜨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낯선 면허 공단에 나 혼자 보내는 것이 내심 불안했던 남편은 예약한 오전 시간에 같이 와 기다려줬지만, 와이파이는커녕 아예 전화조차 안 터지는 DMV 사무실에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근처 카페로 사라졌다. 산골도 아니고 사람들이 계속 오가는 공공 기관에서 왜 전화 신호도 안 잡히는지, 한국인의 눈으로는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라진 남편은 대신 그의 아버지를 내게 보냈고, 그렇게 시아버지와 4시간을 꼬박 기다렸다. 예약을 했는데 4시간이라니… TV도 책도 핸드폰도 기약도 없이 그렇게 말이다.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건 미국에 실존하고 있었다. 


‘주토피아’ 제작자에 전화해서 따지고 싶었다. 실제 DMV 직원들은 나무늘보보다 더 느리다고 말이다. 면허증 하나를 받기 위해 밥도 못 먹고 4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는 내 현실이 믿기지 않을 때쯤, 드디어 기적같이 내 번호가 전광판에 떴다. 입구 직원의 말 때문에 오늘 하루가 의미 없이 날아갈까 걱정됐던 나는, 직원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서류를 눈앞에 펼치며, 면허증 교환이 분명 가능하다고 들었다고 설득부터 하기 시작했다. 나의 걱정과 달리, 그는 “오케이”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교환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면허 교환을 위해 그들의 컴퓨터에 내 정보를 입력하며 국적을 골라야 했다. 직원은 지정된 서류 형식에서 ‘국가 카테고리’를 클릭하고 뒤져보다가 ‘한국’이 없다고 했다. 

엥? 국가 목록에 한국이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싸우스 코리아’ 아니면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라고 쓰여 있을 거라며 다시 봐 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국가 카테고리를 아무리 찾아도 한국의 영어 이름을 찾을 수 없다며 상사까지 불러왔다. 무슨 한국 전쟁하던 때도 아니고, 한국 영화와 가수가 미국 연예계를 휩쓸고 있는 마당에, 미국 공공기관은 아직도 한국을 국가 취급도 안 하는 것인가. 직원 대여섯 명이 무슨 나라길래 국가 목록에도 없냐며 몰려왔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확인하며 자기들끼리 신기하다고 쑥덕였다. 


워낙 아시아 사람이 없는 시골인지라 아마도 내가 그들이 맞은 첫 한국인 주민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한국인은 여기서 면허도 따지 말고 운전도 하지 말라는 건지, 이곳에서 체감한 내 나라의 위상에 기가 죽었고, 옆에 있던 시아버지 보기에도 너무나 민망해졌다. 직원은 이미 정해져 있는 형식에 새로 국가를 추가하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인 데다 자기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을 때 그는 결심한 듯 나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무슨 방도를 찾은 건지, 아니면 딱히 대안 없이 면허증을 만들어주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사진을 찍고 머리 색, 눈 색등 외적 정보를 입력하더니, A4 용지에 새로운 미국 운전면허증을 그냥 인쇄해 주었다. 펄럭 거리는 종이 한 장 짜리 면허증이 진짜 내 공식 면허증인가 싶어 벙쪄 있자, 나중에 집으로 플라스틱 면허증을 보내주겠다며 당분간 이거 갖고 다니라고 종이 쪼가리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진짜 이걸로 운전을 해야 된다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 여기서 무언가를 받긴 했으니 그 길로 카페로 달려가 배부터 채웠다. 


진짜 플라스틱 면허증은 그 뒤로 약 2주 뒤에 배달되었다. 결국은 교환이 되어서 다행이지만, 입구컷부터 시작해서 국가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어렵사리 받은 거라 그런지, 기쁨보다는 애증이 앞섰다. 내 면허증 교환을 계기로, 그 DMV사무실 국가 목록에는 한국이 추가되었을까? 궁금한 마음은 있지만, 내가 정신 수양을 하러 가는 게 아닌 이상 그곳을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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