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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Nov 28. 2023

미국에서 유서를 썼다

미국에서 유서를 썼다. 죽기 직전에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유언에 대해서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30대에 유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그동안 감사했다, 사랑한다 등의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내 사망 보험금 수령이나 얼마 없는 자산과 물건 등을 어떻게 처분해 주길 바라는지, 그리고 내 남은 몸뚱이는 어디에 뿌려주면 좋을지 등의 굉장히 현실적인 걸 써 놓았다. 내 유서가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기보다, 사후 처리에 관한 정보들로 빼곡한 이유는 분명하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 즉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비한 유서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였다.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높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킬로미터'가 아닌 '마일'로 바뀐 속도는 한국 차들이 천천히 달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고, 일반 도로에서도 고속도로의 시속으로 무자비하게 달리는 차들을 보면서, 아무리 내가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사고가 있다는 것도 체감했다. 단순히 ‘차들이 위험하게 달려서 겁난다’가 아니라, 실제 눈앞에서 뒤집어지고 구겨진 차들을 몇 번이나 보게 되면 몇 초 사이로 내 차가 저 지경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에 숨이 막혔다. 


내가 사는 주는 아니지만 플로리다 주가 가까워 자주 가는 편인데, 이상하게 플로리다는 난폭한 운전자들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게 단순히 사람들이 떠드는 편견이 아니라는 걸 플로리다에서 운전할 때마다 알게 된다. 레이싱카 속도로 일명 ‘칼치기’를 하던 차가 다른 차와 부딪힌 걸 보고 직접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대형 사고를 여러 번 목격한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갑자기 도로에서 날아온 물건으로 차가 망가져 멈춘 일도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고속도로에서 신발 한 짝이 날아와 프런트 패널에 박힌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번호판 다는 곳보다 조금 더 아랫부분이다. 공항을 가기 위해 거치는 고속도로였는데 차량이 많지도 않았다. 순항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차량 앞유리에 허공을 나는 무언가가 나타나더니 미친듯한 속도로 내 차로 돌진했다. 당황해서 ‘어어어어!’ 소리만 외치는 사이, 결국 묵직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야 말았다. 그 충격으로 차가 회전하거나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내부에서는 볼 수가 없으니, 불안한 마음에 급하게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주유소에 들러 차를 살폈다. 

고속도로에서 날아와 박힌 신발 한짝
고속도로에서 날아와 박힌 신발 한짝

그랬더니, 이렇게 생긴 고무장화 한 짝이 프런트 패널 안에 처박혀 있었다. 고무 신발 한 짝으로 프런트 패널이 이 정도로 눌렸다는 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진짜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누가 고속도로에서 신발이 날아와 차에 박힌다고 상상이나 했을까. 보험사에서 안 믿어줄 것 같아 사진도 여러 장 찍어 뒀다. 그래도 신발 한 짝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물건이었으면 패널 조금 부수는 걸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시아버지는 야밤에 쇠파이프 더미를 실은 트럭 뒤를 달리다가 그것들이 덮치는 바람에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어야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 들리는 동네 총기 사고도 내가 유서를 쓰는 데 한 몫했다. 관리를 잘 못해 발사된 총기 사망 사건이나, 이웃 커플이 사랑싸움을 하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총을 쏴, 의료 헬기가 집 앞을 오가는 걸 봤을 때, ‘내가 진짜 다른 나라에 있구나’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베트남에 살 때도 오토바이 사고를 크게 입을까 마음을 졸이는 일이 많았지만, 이렇게 유서를 남길 정도로 갑작스러운 사망을 준비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만일 남편과 내가 동시에 사고를 당한다면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 연락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말이다. 


우리 부모님과 남편의 부모님은 서로 연락처도 모르고, 연락처를 안다고 한들 언어 장벽으로 쉽게 소통이 될 사이도 아니다. 물론 내게 사고가 생기면 영사관을 통해 한국 가족에게 연락이 닿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날 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동생에게 시부모님의 연락처, 그리고 시부모님께 동생의 연락처를 알려드렸다. 조금이나마 영어가 가능한 동생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미국 가족들과 더 소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미국에서 뭔 일이 있냐고 걱정하셨지만, 뭔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뭔 일이 생길 걸 대비해서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유서까지 써봤다는 건 굳이 알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가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 쉽게 안 죽는다고 말이다. 물론 나도 남의 땅에서 객사하고 싶은 마음은 모래 한 알 만큼도 없지만, 가는 데 순서 없고, 내 나라에 있는 게 아닌 이상 이 정도는 현실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해외 생활이라는 게, 이토록 죽음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만일을 대비해 사후 처리에 대한 유서는 써 놨지만, 부디 제발 이걸 쓸 일은 없기를, 내 명줄은 미국 고속도로 길이보다 길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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