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 띠! 띠!’ 실눈을 뜨기도 힘들 만큼 곤히 잠이 들었던 새까만 밤, 시끄러운 소리가 귓구멍을 관통했다. 머리가 징, 하고 울릴 정도로 크고 기분 나쁜 기계음이었다. 나보다 잠귀가 밝은 남편은 소리가 울리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의 진앙지인 머리맡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나를 깨웠다.
“일어나, 긴급 상황이야.”
그는 내게 한 마디를 던진 후 바로 거실로 나가 TV를 틀었다. 겨우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이라도 난 게 아니고서는 이 시간에 이러는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가 급히 TV로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날씨 뉴스였다. 미국 지도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고, 그 화면을 보며 기상 캐스터는 격양된 목소리로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건 보통의 날씨 예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의, 이번 주의 날씨를 알려주는 뉴스가 아니라, 지금 현재 날씨를 생방송으로 전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뉴스에 집중했다. 곧이어 지도 화면이 사라지고, 캐스터 뒤로 지역 CCTV화면이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네이도가 발생한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 살며 폭설도 많이 봤고, 부산에 놀러 갔을 때 길거리에서 태풍을 직격으로 맞아보기도 했으며, 도시에 살 때는 폭우로 종아리까지 잠긴 물을 뚫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 적도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에서는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내린 폭우로 집이 침수되는 일까지 겪었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토네이도는 없었다. 내게 토네이도는 이름만 들어본 어느 전설 속의 날씨 현상이었기에,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 남의 나라에 와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해안가 지역인 미국의 이 남쪽 도시는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자주 충돌해, 매년 크고 작은 돌풍과 토네이도가 있다. 내가 이 지역으로 집을 알아보러 왔을 때도, 토네이도 피해를 복구하고 있던 시점이라 사람들은 거리에 어지럽혀진 나뭇가지와 부서진 전깃줄을 수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재해가 있는 곳이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나, 알고 있어도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왠지 현재의 평화가 영원할 것만 같아 애써 무시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매년 같은 재해가 발생하는 지역이 내가 왔다고 해서 멀쩡할 리 없었고, 뉴스에서는 다시 발생한 토네이도의 경로를 따라 지역 사람들에게 대피 명령을 하고 있었다.
화면에서 매일 같이 지나는 거리가 엄청난 강풍에 쓸려갈 듯한 걸 보자, TV소리 너머로 밖에서 바람이 웅웅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밖을 확인하려고 창문 가까이 다가가자 남편은 소리를 지르며 창문에서 물러서라고 했다. 태풍과 토네이도가 왔을 때 제일 위험한 곳이 바로 창문 옆이었다. 그는 토네이도가 근처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갑자기 움직일지 알 수 없으니 대피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하실도 없고 방공호 같은 것도 없는 데다,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별 수 없이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전이 되었다.
전깃줄이 땅속에 묻혀 있기도 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전깃줄은 대부분 바깥에 대충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강한 바람에 쉽사리 전기가 끊어졌다.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남편이 플래시 라이트를 켜 침대 위 베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화장실로 도망갔다. 도망간 화장실에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웅크린 후, 베개를 머리 위에 둘렀다. 딱히 대피할 곳이 없는 우리에게 그나마 안전한 장소가 화장실 욕조였다. 창문이 있어도 아주 작은 데다, 벽에 타일이 발라져 있으니 그나마 다른 방보다 튼튼했고, 그중에서도 무거운 욕조는 토네이도 바람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공호 같은 것이었다. 토네이도에 집이 휩쓸리면, 지붕은 물론이고 집이 가로로 잘린 듯 뜯겨 나가지만, 운이 좋으면 욕조 안에서 목숨은 건질 가능성이 있었다.
언제 가져왔는지 남편은 작은 라디오를 손에 들고 있었다. 가끔 건조된 비상식량을 주문하거나, 옛날식 소형 라디오와 무전기를 사들일 때 어디다 쓰려나 싶었는데, 어릴 때 이런 상황을 겪어 본 그의 큰 그림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우리 동네와 옆 동네 이름을 언급했다. 부디 토네이도가 사람 없는 쪽으로 이동하길 간절히 바라며 숨을 죽인 채 머리 위에 두른 베개를 더 꽉 쥐었다. 몇 분 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남편은 이제 괜찮다며 나가자고 했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 핸드폰을 켰다. 전기는 나갔지만 다행히 핸드폰 데이터는 쓸 수 있었다. 그걸로 뉴스를 틀고 현재 태풍의 경로를 확인하자, 아슬아슬하게 내가 사는 곳 바로 위쪽을 지나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꽤나 큰 토네이도 같았는데, 우리가 입은 피해는 정전뿐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컴퓨터로 일을 하기 위해 전기를 쓸 수 있는 카페로 향했고,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몇 개를 보았지만 무너진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전봇대 피해도 크지 않았는지 그날 오후에 전기가 복구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살다 살다 한 밤중에 살겠다고 물 떨어지는 욕조에 웅크려 보기는 또 처음이다. 이 나라에서 지낼수록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한다. 토네이도가 무서워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갈까 하다가도, 태풍이 없으면 폭설, 산불, 지진 등 다른 자연재해가 있으니, 딱히 완전히 안전한 지역도 없다. 토네이도 걱정은커녕 정전 걱정도 없이 지냈던 한국 생활이 한층 그리워지는 날이다. 오늘은 생존법 책이나 사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