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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Jan 12. 2023

엄마는 술상무

외할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이었다. 평소 피부처럼 입고 다니시던 낚시 재킷 안에서 소주가 줄줄이 나올 만큼 술을 끼고 사셨다. 나이 드시고 하던 일을 관두고서는, 매일 동네 할아버지들과 건어물 안주를 곁들여 술을 드셨고, 결국은 알코올성 치매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런 할아버지 때문에 술을 싫어했다. 엄마가 자진해서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가끔 아빠가 TV를 보며 맥주캔을 따도 옆에서 한 모금 정도 마실 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엄마가 술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엄마의 간은 외할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이다.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그런 천하무적의 간 말이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가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맥주, 소주, 와인, 양주, 고량주.. 그 어떤 술을 엄마 앞에 가져와도, 마시는 즉시 몸에서 해독이 되는지, 혀 한 번 꼬부라지지 않으며, 걸음 한 번 휘청하지를 않는다. 엄마가 싫어하든 말든 할아버지는 그런 간을 엄마에게 넘겨주고 가셨다. 그리고 엄마는 필요할 때 그 간을 아주 요긴하게 이용했다. 


술을 싫어했기 때문에 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밖에서 술을 마실 일은 꽤 많았다. 한국은 술에 매우 관대한 나라인 만큼, 술을 매우 엄격하게 마시게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상대의 알코올 수용량과는 상관없이 술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었고, 회사를 오래 다니기 위해서는 업무 능력보다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상사와 술자리를 얼마나 자주 갖는지가 중요한 시대도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술 강요 문화와 '먹고 죽자' 문화가 줄어들고 있지만,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거라고 본다. 때문의 남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고, 남성성이 강조되는 군대에서 얼마나 수직적인 술 문화가 있었는지 말을 안 해도 알 것이다. 


군인이었던 아빠는 매일까지는 아니지만 회식자리가 정말 많이도 있었다. 문제는 아빠는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마실 줄을 모른다. 아빠의 간은 아예 알코올 해독 능력이 없는지, 맥주 몇 잔에 바로 뻗어버리는 그런 장기였다. 그러니 회식자리에서 사회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간의 능력과 내일의 일정과는 상관없이, 상관이 주는 술이라면 무조건 마셔야 했던 그런 회식자리는, 하루 중 가장 힘든 업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빠에게 오히려 부부동반 회식은 반가운 자리였다. 아빠에게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회식자리에서 술을 못 마시는 아빠를 대신에 술상무를 자청했다. 아예 아빠와 자리를 바꿔 앉아 술잔이 돌 때마다 엄마가 마셨고, 상관들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엄마의 자태가 신기해 계속해서 술을 따라주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술 몇 잔에 뻗어버린 아빠를 되려 부축해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집단이던 정치질이 없는 곳이 없고, 군대도 진급이 걸린 문제에 은근한 시기. 질투. 모함이 넘쳐나는 곳이다. 열을 잘해도 자칫 방심해 하나의 부족한 점이 보이면 그걸 밟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곳에서, 술이 약해 상관보다 먼저 취해 곯아떨어져 있는 건 결코 장점이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상관이 주는 술을 마다하는 건 말도 안 됐던 게, 그때의 군대식 술문화였다. 하지만 아무리 술이 약해도, 아내가 대신해 상관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끝까지 술을 마셔주는데, 거기에다가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빠가 술을 못 마셔도 마이너스가 되기는커녕 반대로 대단한 사람을 가족으로 맞았다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빠의 군대 생활 8할은 엄마의 간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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