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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Feb 08. 2023

나이 많은 소꿉친구

어릴 때 관사 안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학교 밖에서는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굉장한 아쉬움을 느꼈었다. 친구들이 사는 동네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에 학교 갔다 한 번 집에 돌아오면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설사 내가 아닌 친구가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상황이라도 군부대 안이었기에 쉽게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로 만화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살았는데, 통학 길에 운전을 해 주던 아저씨가 그런 나와 동생을 좀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 같다. 


27살이라는 남들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에 입대한 아저씨는 운전도 해주고 관사 바로 앞에 있는 테니스 장을 관리해 주는 일을 주로 도맡아 하고 있어, 거의 매일 같이 우리 가족과 얼굴을 보며 지냈다. 인성도 좋고 다정했던 아저씨는 철없고 아는 거 없던 나와 동생에게 이것저것 소소한 것들을 알려줬다. 예를 들어 새로 나온 영화 내용이나, 산속에서 작은 동물을 잡는 법이라던가, 새들이 몰래 둥지를 튼 장소라던가 말이다. 부대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지만 진심으로 나와 동생에게 삼촌처럼 잘해줘서 동생도 그 아저씨를 엄청 따랐다. 심지어 황금 같은 휴가 기간에도 우리랑 놀아준 적이 있는데, 나와 동생이 방학 기간에 외가인 인천에 있을 때, 서울로 휴가를 나온 아저씨가 전화를 했다. 그리고 친척언니와 나, 동생을 데리고 롯데월드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아주며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부대 안에 있을 때야 자주 얼굴을 보니 잘해줄 수 있지만, 군인에게 귀하디 귀한 휴가까지 부대 안 꼬마들에게 쓴다는 건 거의 성자 수준이 아닌가. 엄마는 부모도 아닌데 애들을 챙겨 놀이공원까지 데려가 준 아저씨에게 너무 고마워했고, 나랑 동생도 부모님보다 나이차이가 덜 나는 젊은 아저씨가 수준에 맞춰 놀아주니, 마치 친구랑 따로 소풍 간 것처럼 신이 났었다. 


우리 집 개들한테도 살뜰히 대해줘서, 개들은 아빠보다 오히려 그 아저씨를 더 좋아했다. 우리가 집에 없을 때는 아저씨가 부대 안 잔반을 가져와 개들 끼니를 챙겨주기도 했고, 단순히 귀여워만 한 게 아니라 자진해서 개 몸에 붙은 진드기들까지 떼어줬다. 밖에 사는 동물한테는 몸에 붙어 기생하면서 피를 빨아먹고사는 진드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진한 회색의 동글동글한 모양이었고, 피를 많이 빨아먹은 놈일수록 개들 피부에 딱 붙어서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으며, 몸에 가득 찬 피 때문에 몸이 부풀어 터질 것처럼 컸다. 그런 놈들을 장갑을 끼고 하나씩 떼어다가, 주변에서 돌을 주워 그 돌로 짓이겼다. 그렇게 확실하게 죽이지 않으면, 개들한테 바로 다시 옮겨 붙는다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개들 수명의 5%는 아저씨한테 지분이 있을 것이다. 

내무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부대 안에서 애들이랑 개들한테 제일 인기 있는 사람은 그 아저씨였다. 전방으로 배치돼서 군생활이 녹녹지 않았을 텐데, 본인 시간 써가며 우리를 챙겨주던 아저씨는 제대 후에도 결혼한다고 따로 연락을 해왔다.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다고 한 게 마지막 연락이었는데, 그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나한테 일종의 소꿉친구 같은 존재였다. 이 지역 저 지역 옮겨 다니며 살아 고향이라고는 따로 없는 내게, 국어책에서 배운 소꿉친구라는 단어는 참 와닿지 않는 단어였는데, 아저씨를 생각해 보면 '친하게 지낸 군인 아저씨', '부대 안 삼촌' 이런 말보다는 소꿉친구라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린다. 물론 나보다 한참 나이가 위인 아저씨를 소꿉친구라 표현하는 건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어린 시절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자주 보면서 친구처럼 놀았던 사람이기에 이 단어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친구라는 게 꼭 같은 또래의 사람이어야만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벗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와 신분을 떠나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거니까. 

그때의 아저씨 보다 훨씬 나이를 먹고 나서야, 나는 기꺼이 내게 소꿉친구가 되어준 아저씨의 배려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를 떠나 나는 아저씨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소꿉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서 누군가 나를 소꿉친구로 추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굉장히 가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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