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대부분을 시골 군부대에서 보냈던 나는 야생동물과의 추억도 많다. 허락된 관사의 크기가 넓을 때는 뒷마당에 세상 특이한 동물들도 키웠다. 개들은 기본에다가 토끼도 종류별로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어디선가 거대 닭장을 가져와서는 거기에 닭과 오리를 비롯해 각종 새들도 키웠다. 심지어 공작새도 있었다. 동물원에서 훔쳐라도 온 것인지 어디서 공작새를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그저 이상한 지 모르고 공작새가 넓게 펼친 화려한 날개를 보며 신기해했었다. 새들은 새벽마다 시끄럽게 울어대서 잠을 설치게 하는 건 짜증 났지만, 따끈한 달걀을 아침식사로 선물해주기에 만족스러웠다.
야생 동물을 직접 잡아 키울 때도 있었는데, 바로 다람쥐였다. 크기도 작고 몸도 날쌘 다람쥐를 손으로 잡기는 힘들고,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나 밤 등을 자주 다니는 것으로 추정대는 길목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동그랗게 밧줄을 매달아 두면 가끔 밧줄에 걸려있는 다람쥐를 보고는 했다. 지금의 나라면 굳이 구조가 필요하지도 않은 동물을 그런 식으로 잡지는 않겠지만, 그땐 그저 산에서 뛰어다니는 애들을 직접 내 손으로 만져보고 가까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 동물들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다. 부대 안에서 운전을 해 주던 군인 아저씨와 종이 박스를 잘라 다람쥐 집을 만들어주고 거기에 살게 했는데, 보기보다 똑똑한 다람쥐들은 다음 날 비가 많이 오자, 눅눅해진 종이 박스를 찢고 다시 살던 야생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다지 귀엽지만은 않은 동물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개들 밥을 주러 부엌 뒷문을 열었던 엄마가 비명을 질러서 가보니 기다란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뱀과 구렁이 중간 사이즈의 통통한 뱀이었다. 엄마는 부리나케 거실로 뛰어들어가 아빠에게 전화해 뱀이 나타났다고 난리를 쳤다. 운 나쁘게 우리 집으로 들어온 뱀은 그날 아빠 부대원들에 의해 술이 되었다.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목숨의 위협을 느낄만한 동물을 만났을 때다. 어째서 날도 그런 날을 고른 것인지 인천에서 외가식구들이 단체로 놀러 왔을 때였다. 이모네, 삼촌네가 모여 큰 봉고차를 몇 시간씩 타고 와, 집 안이 붐비고 시끌벅적했다. 너무 멀어서 오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는데, 날이 따뜻해지니 산 여기저기에 돋아다는 나물을 뜯으러 온 것이었다. 힘들 법도 한데, 할머니와 이모는 오자마자 엄마와 함께 쑥떡을 해 먹겠다며 슬리퍼를 신고 부대 안 산을 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런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강원도 산이란 산은 전부 뒤질 것처럼 대단한 각오로 올라갔다가 한참을 내려오지 않았다. 삼촌들은 부대를 구경하겠다며 아빠를 따라 사라졌고, 나는 친척들과 부대 안 테니스 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장난감도 없고 오락실도 없고 딱히 부대 안에서 애들이 할 게 뭐가 있겠는가. 나와 별 나이 차이가 안 나는 친척 언니들은 심심해했고, 나는 딱히 내가 소개해 줄 곳도 해 줄 것도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와 이모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들어가! 빨리 집으로 뛰어들어가!!"
뛰어내려오는 건지 굴러내려 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자태로 비명과 고함이 뒤섞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과 긴박한 자태를 보고 무언가 위험한 게 다가 오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함께 있던 친척들과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모두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 앞에 모여 숨을 죽였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공포에 일그러져 뛰어오던 어른들의 표정과 달리 집 밖은 너무나 고요했고 뭐가 돌아다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호기심을 못 이긴 나는 나무로 된 현관 문고리를 살짝 잡고 돌렸다. 그리고 약 10센티가량의 틈을 만들어 밖을 내다봤다. 밖은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네" 하고 문을 더 열려던 순간, 거대한 동물이 앞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몸 전체가 짙은 고동색의 빳빳한 털로 뒤덮여있었고, 몸통은 그 고동색보다도 훨씬 어두운 검은색 줄무늬 같은 게 그어져 있었다. 분명 돼지 모양의 코였지만, 짧고 뭉뚝한 돼지의 코와 달리 훨씬 기다랗고 늘어진 코를 갖고 있어 언뜻 뿔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농장의 돼지보다는 곱절은 큰 크기였다. 그 두툼한 몸을 무게감있게, 동시에 날렵하게 움직여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 생에 처음으로 본 야생 멧돼지였다. 만일 길 한가운데서 이 녀석과 마주했다면, 나는 이미 멧돼지 발에 깔아뭉개진 지 오래일 것이다.
멧돼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관에 있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꺅꺅 비명을 질러대며 문을 닫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철문이 아니라 나무문이었기 때문에 돼지가 온 힘을 다해 문으로 뛰어든다면 문이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 안에는 어른 세 명에 아이들 대여섯 명이 있었는데, 모두 여자들이었다. 엄마 혼자 거실로 뛰어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머지는 전부 몸으로 문을 막아서고 있었다. 멧돼지가 문 앞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문을 열어둔 베란다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베란다는 방충망이 닫혀있었다. 멧돼지는 그걸 찢고 들어올 생각은 못 한 채 그저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몇 분 뒤 아빠와 총을 든 부대 안 군인들이 도착했고, 아직 근처에 있을 멧돼지를 찾아 나섰다. 전방 부대 안이었기에 총은 너무나 쉽게 가져올 수 있는 무기였다. 결국 그날 저녁 부대에서는 멧돼지 삼겹살 파티가 열렸다. 나는 잠자리에 들며, 뱀이며 야생 멧돼지가 튀어나오는 이 산골이 더 무서운 곳인지, 잡히기만 하면 음식이 되어 버리는 이 군부대가 더 무서운 곳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