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이지 않는 집

by 라봇

겨울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걸 보고 있자면 마음이 심란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눈이 오면 신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이제는 돈 벌러 눈 길로 뛰쳐나가야 하니 말이다. 물론 세상 하얗게 쌓이고 있는 눈송이들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건 내가 따뜻한 실내에서 여유롭게 창 밖을 내다볼 수 있을 때나 느끼는 감상이다.


사실 나는 추운 겨울과 함박눈에 꽤 익숙한 사람이다. 4월까지도 집 안에서 수면 잠옷, 수면 바지, 수면 양말로 온몸을 꼭꼭 덮고 있는 내 옷차림을 보면, 동남아에서 평생을 살다 온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추위를 잘 타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이 많이 오는 영동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상 기후로 서울도 겨울에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는 일도 있는데, 내가 살던 산골짜기 부대 안은 그 옛날부터 겨울에 영하 20도는 기본이었다.


온 지역이 얼어버린 듯한 그런 미친 날씨에, 겨울 내내 모두 동상 안 걸리고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영하 20도에는 동파 문제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커다란 양동이에 어디선가 물을 받아와 가스레인지에 끓인 후 목욕물로 사용해야 했다. 물론 세탁기도 날이 풀릴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은 옷을 이 삼 일간 입고 등교한 적도 있었다.


차량들도 일찌감치 월동 준비에 들어가야 했는데,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에 있던 작은 자가용을 비롯해 군부대 지프차들은 전부 어디론가 끌려가 타이어에 락가수처럼 체인을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그 때문에 타이어가 굴러갈 때마다 덜거덕거렸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 길에 미끄러져 논 밭에 처박힐 수 있기 때문에 타이어체인은 필수였다.


그래도 그땐 내가 운전하는 게 아니었고 회사에 가는 게 아니었으니, 뼛속까지 시린 날씨에도 나는 눈이 내리는 걸 좋아했다. 산간 지방의 눈송이는 잘 익은 과일처럼 크고 탐스러우며 눈의 질이 좋아 솜처럼 부드러웠다. 그 느낌이 좋아 낮에 눈이 내릴 때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피부가 빨개질 때까지 눈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몇 개의 수제비 반죽을 만들기도 했다. 산속에 있는 집이라 보통 저녁때부터 밤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20센티, 30센티 쌓이는 건 기본이었는데,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도 안 밟은 눈 속에 뛰어들 기대감으로 잠들곤 했지만, 안타깝게도 군부대 안에서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장병들이 내가 자는 사이 관사 앞 눈을 다 쓸어놨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똥이라고 할 만큼 싫어했다. 눈이 쌓일 때마다 삽과 빗자루를 동원해 열심히 치워야 했던 게 그 이유다. 그들은 부대 안 눈을 치우면서 우리가 사는 관사 앞 길까지 전부 치워버렸다. 물론 추운 날씨에 관사 앞마당까지 와서 깨끗하게 치워준 노고는 매우 고마웠지만, 폭신한 눈 침대에 뛰어들 생각이었던 나는, 현관문을 열 때마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들의 고생은 뒤로 한채, 일찌감치 눈을 치워버린 장병이 미워질 정도였다. 그럼 눈이 와도 우리 집 앞은 치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데, 소심했던 성격 탓에 직접 말하지를 못 했다. 눈이 치워지지 않은 장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집에서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봤자 군부대 안이었고, 그곳은 보다 빠르게 깨끗하게 눈이 쓸려나가는 곳이라, 밤새 눈이 온 게 맞긴 한 건가 의심할 정도의 장소였다. 결국 나는 애먼 엄마 아빠에게 부대 안에는 눈이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엄마는 전혀 생각지도 못 한 걸로 내가 속상해하자, 함박눈이 내릴 때 관사 앞 눈을 치우지 말아 달라고 장병들에게 부탁했다. 나중에는 관사로 들어올 차량 때문에 결국 눈을 치워야 했지만, 그들의 배려로 잠깐이나마 고대했던 하얀 눈 밭에서 뒹굴 수 있었다.


지금은 추위를 버텨내기엔 몸이 너무 비루해졌기에 오히려 눈이 오는 걸 불평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한 때는 부대 안에서 눈 쌓인 곳을 찾아 헤맬 만큼 나도 눈에 흥분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종종 회상한다. 그리고 지금 그 관사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도 겨울마다 내가 했던 고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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