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네시 남자와 부천 여자

by 라봇

군대 가서 어영부영 기다렸던 남자친구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1년을 넘겼다.

누군가를 길게 만나는 건 나한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도 “What”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말을 이해할 수 있는 파란 눈의 남자가 이리 오랫동안 내 옆에 있을 줄이야.


우리는 금요일 밤 부천의 한 모임에서 만났다. 집에서 엉덩이를 지지면서 핸드폰을 하다가, SNS 이벤트 페이지에서 발견한 친목 모임이었다. 할 일 없는 부천 사람들끼리 모여보자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모임 같았는데, 10명 이내로 사람들이 종종 모이는 모양이었다. 보통의 친목 모임이라면 별로 관심이 없었겠지만 그 주체자가 한눈에 봐도 ‘외국인이다’ 싶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서울도 아니고 경기권에서 어느 외국인 여성이 주체해 만든 모임이라는 게 흥미로워서 옷을 주워 입고 나갔다. 스무 살 때부터 부천에서 살기 시작해 딱히 동네 친구가 없던 나는, 동네 모임인 만큼 동네 친구를 만들 수 있길 바라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이 모여있었다. 알고 보니 부천 내 영어학원에서 근무하는 원어민 선생님들이, 본인 또래의 평범한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만든 모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반 영어반 서로 아는 단어를 섞어 쓰며 수다 떠는 게 재미있어, 바로 다음 주에 또 나갔다.


두 번째 나갔을 때는 내 눈을 사로잡는 외국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거너였다.

처음부터 내 눈을 잡아끌었던 건 아마도 그가 부드러운 얼굴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선이 예쁜 남자를 좋아했더랬다. 어떻게 연락처를 받을까 고민하다가 모임에서 주말에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먼저 자리를 떠나는 거너에게 영화 시간이 정해지면 알려주겠다는 핑계로 카톡 아이디를 물었다. 결국 이틀 뒤 영화를 보러 나온 사람들은 우리 둘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영화 보러 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있었는데 거너가 영화 계획은 취소 됐다고 못 나오게 했고, 나에겐 아무도 영화 볼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우리 둘이 봐야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쿵짝이 잘 맞는 천생연분일 줄이야.


그렇게 처음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드러냈던 우리는 재고 따질 것도 없이 바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거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코딱지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테네시’ 주에서 왔다고 했을 때도, 구글 지도에서 한참 찾아봐야 했고, 그가 즐겨 듣는 ‘컨트리 뮤직’도 난생처음 듣는 노래들이었다. 언어도 문화도 취향도 전부 다른 우리가 서로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며 만나다 보니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때 거너는 다니던 한국 회사와의 계약만료를 앞두고 있었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 없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진짜 베트남 갈까?”

누구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 해 여름, 우리는 얼마 안 되는 휴가비에 맞춰 하노이에 함께 갔었는데, 저렴한 물가와 입에 딱 맞는 음식들, 한국과 비슷한 문화에 매료되어 둘 다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던 차였다.

베트남 어디로 갈지 무슨 비자로 갈지 가서 일은 어떻게 할지 정말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저 거너는 빡빡했던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고, 나는 더 나이 먹기 전에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여름휴가 때 리조트에서 본 베트남의 모습이 다가 아닐 텐데, 진짜 가냐는 몇 번의 질문을 주고받은 후 바로 베트남행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말 때문에 우리는 집도 직업도 지인도 정보도 아무것도 없이, 1년짜리 비자만 손에 쥔 채 베트남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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