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베트남에서 살기로 고른 지역은 '다낭'이었다. 본래 경제 활성화가 잘 되어 있고 외국인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호치민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부동산 투어를 하면서 완전 그 도시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새 떼처럼 몰려다니는 오토바이 수백 대, 거기서 나오는 매캐한 매연, 보행자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운전자들, 아직 다 짓지도 않은 건물을 매물이랍시고 보여주는 부동산 업자, 길거리에서 마약을 권유하는 약쟁이, 공항에서 부터 쫓아오는 날치기 강도 등 내가 경험한 호치민은 범죄의 도시였다.
호치민도 큰 도시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군에 사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지만, 단기간에 호치민의 안 좋은 것만 몰아서 경험하게 되니 이 도시에 장점이 보일 턱이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식중독까지 걸려 호텔에 서 위아래로 뿜어대며 실신할 뻔한 덕에 최대한 호치민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대체지역으로 고른 곳이 휴양지로 유명한 다낭이었다. 하노이랑 호치민에 비해서는 작은 도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나는 그 여백이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일자리를 생각해 봤을 때 다낭은 적합한 도시가 아닌 것 같아도 한국에서와는 조금 다른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한 몫했다.
그렇게 다낭 거주 비자를 딴 후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비행길에 올랐다. 기대와 달리 도착하자마자 거센 태풍에 쓸려 갈 뻔했지만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숙소 주인이, 숙박객 등록을 해야 한다면서 여권을 요구했다. 그에게 여권을 건네주기 위해 가방을 뒤졌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캐리어 두 개를 다 뒤집어 까도, 옷가지랑 주방 도구만 나올 뿐, 제일 중요한 여권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다낭에 도착했고,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동안 따로 들른 곳도 없었는데 도대체 여권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여권이 없어졌다면 베트남에서도 대사관을 통해 임시 여권을 만들 수 있지만, 문제는 잃어버린 여권 안에 베트남 비자가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따서 입국한 따끈따끈한 베트남 비자는 앞으로의 합법적인 베트남 생활을 위해 여권보다도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한 달 정도 머물다가 바로 베트남으로 온 거너는, 시차 때문에 계속 누워있다가 내 여권 사태가 발생하자 그제야 잠이 깨는 듯 보였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혼자 숙소 베란다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날씨는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시속 100km/h 가까이 휘몰아치는 태풍 바람에 사정없이 얼굴을 맞고 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한바탕 바람에 온몸을 두들겨 맞고 나자, 번뜩 내 여권이 있는 곳이 생각이 났다. 입국심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 여권을 꺼낸 적이 한 번 있었다. 바로 공항 내 유심카드 판매소였다.
심카드를 살 때 여권을 건네준 후, 택시 부르기 바빠서 제대로 챙기지 않고 그냥 나온 것이 생각났다. 평소에 덜렁대서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여권은 한 번도 분실한 적이 없었는데, 이민 첫날 공항에 놔두고 오다니, 멍청해도 이런 똥멍청이가 있나 싶다. 급하게 다시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동시에 인터넷을 뒤져 공항 번호를 알아냈지만, 베트남어로 인사말도 모르는 내가 통화가 될 리 만무했다. 핸드폰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거너가 대신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상대 쪽에서 뭐라고 씨부리던 계속 '잉글리시 스피커! 잉글리시 스피커!'를 외쳤다.
말도 못 알아듣는 막무가내 외국인의 요청이 통할까 싶었는데, 세네 번의 재통화 끝에 드디어 영어 가능자와 연결이 되었다. 거너가 능통한 영어로 그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 매우 믿음직스러웠다. 영어밖에 못 하는 사람이지만;;
어렵사리 연결된 전화덕에 공항 출국장 앞에서 한 직원을 만났다. 그에 손에 들린 내 하늘색 여권 케이스를 본 순간 하마터면 그의 손등에 키스를 퍼부을 뻔했다. 고개 숙여 '쌩큐'를 여러 번 말한 후 뒤돌아서는 순간 그가 나를 붙잡았다. 그냥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엥? 뭐가 또 남았는가... 그는 여권에 수상한 점이 없는지 보안 직원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며 우리를 공항 경비에게 넘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는 여권을 빼앗겼다.
10분이 흘렀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뒤져보아도 내 여권에 수상한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비자도 있는 데다가 만일 비자가 없어도 한국인은 베트남에 15일을 체류할 수 있다. 도대체 왜 나를 안 보내주는 것인가!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아, 돈!
아직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안 잡힌 나라에서는 공무원이건 뭐건 간에 뒷돈을 요구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돈을 달라는 게 아니고서야 잃어버렸다 되찾은 여권을 들고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고민에 빠졌다. 주고 빨리 떠날 것인가, 아니면 버틸 것인가.
나는 그냥 눈치 없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여권을 잃어버린 건 내 잘못이지만 그거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공항 경비한테 뒷돈을 줘야 하는 건 억울했다. 어차피 상대랑 말도 안 통하겠다, 니가 안 주면 나도 줄 때까지 안 간다라는 심산으로 계속 기다렸다. 어차피 백수로 온 터라 숙소에 일찍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결국 끝까지 모른 척하는 내게, 경비는 백기를 들고 여권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길고 긴 다낭의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