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너랑 나는 언어, 문화적 차이를 넘어 성격도 꽤나 다르다. 내향형인 거너는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반면,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집에 있는 날보다 싸돌아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경기도에 살면서도 서울을 이웃집 넘나들 듯 다니며 열심히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녔다. 그런 내가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베트남에 온 것도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베트남에 오자마자 현지 친구를 너무나 만들고 싶었다. 친구라는 존재도 필요했지만, 베트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나라 생활방식에 대해 배우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현지 친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집 문제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느라 누굴 만날 여유가 없었고,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하면서 상태가 나아져 외출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 만들기에 관심이 없는 거너를 두고, 나 혼자 간 곳은 다름 아닌 롯데마트였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마트가 그곳밖에 없었다. 재래시장 이용하는 법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내게 친숙한 한국 마트를 먼저 찾았다. 쇼핑 후에 마트 내에 있는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바로 내 옆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하얗고 작은 여자 아이가 눈에 띄었다. 내가 그 아이를 힐끔힐끔 쳐다봤던 이유는,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책 때문이었다. 카페 안에서 내가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자였다. 바로 한국어 책이었다.
그 학생은, 자기 몸통만큼 크고 두꺼운 한국어 교재를 펴놓고 열심히 언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베트남에 한국 교민도 많고 한국 회사도 늘면서, 한국어를 배워두면 취업이 잘 되는 상황이었고, 이미 많은 베트남인들이 그런 이유로 한국어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마침 눈앞에서 이렇게 한국어를 공부하는 베트남 사람을 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 것도 없이 내가 괜히 뿌듯했다.
말을 걸고 싶었다. 친구가 고팠는데, 어디 가서 사람을 사귀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막 붙잡고 얘기할 대담함은 없고. 그런데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국인이 말을 걸면 좀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 영업용 미소를 띠며,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필했다.
“ 안녕? 난 얼마 전 이사 온 한국 사람이야. 한국어 공부하네? “
최대한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로 말을 이어나가니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을 트고 10분이 지나자 그녀의 친구가 왔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 친구가 더 나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 친구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보다는 베트남어를 몰라 영어를 쓰고 있다는 것에 관심 있어했다. 뭔가 외국인 친구를 갖고 싶다는 욕구와, 나랑 얘기하기 위해 자연스레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 보였다. 결국 나는 처음 말을 건 대학생이 아닌 그녀의 친구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재미있는 점은 내가 그 친구의 성별을 모른다는 점이다.
약간 통통한 체격에 짧은 머리, 목소리도 허스키하고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서 성별을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렴 어떠랴. 나에게는 여기서 아는 사람 한 명 더 생기는 게 절실했다.
적극적인 나의 액션으로 다시 약속을 잡고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그때 실감했다.
우리가 친구가 되기에는 언어적 장벽이 너무 거대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베트남어 실력은 갓난아기 옹알이 수준에도 못 미쳤고, 이 친구도 외국어는 서툴러 우리는 계속 구글 통역기를 써야 했다. 아무리 통역기가 잘 되어 있어도 그렇지,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핸드폰에 얼굴을 처박고 띄엄띄엄 얘기하는 건 어지간한 에너지와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런 대화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보다 몇 배의 노력이 드는 상황을 감내하고 이해해 주기에 우리의 관계는 아직 너무나 가벼웠다. 역시 친구 사귀기에, 용기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다. 카페에서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었던 나의 용기는 가상했지만, 현지인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나는 베트남어 수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카페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였지만, 그래도 그 계기로 한 단계 한 단계 필요한 것들을 채우기 위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으니, 그걸 꼭 의미 없는 만남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뭐든지 시도는 해봐야 된다. 그래야 내가 뭐가 부족한 지, 뭐가 필요한 지, 뭘 해야 하는지 절절히 깨닫는다. 특히 외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시도가 더 필요하고, 용기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지만, 용기가 있어야 시도를 하게 되니, 나한텐 용기를 내 볼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 있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