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다단계를 만났다

다단계를 통한 진정한 세계화

by 라봇

베트남에서 가깝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 '마리에'는 일본에 사는 친구로부터, 지인이 사업차 다낭에 가는데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사업도 도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리에는 자기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 어색하다며 함께 만나달라고 했다. 할 일 없던 나는 그러기로 하고, 부탁받았다는 지인이 있는 호텔로 향했다. 호텔 카페에서 처음 만난 ‘요코’씨는 40대 후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었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상냥해, 처음부터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요코 씨는 오랫동안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으며, 마리에와 나를 자신의 호텔방으로 데리고 가 판매하는 미용 기계 시연을 보여줬다. 살집이 많아 흘러내릴 것 같은 내 얼굴에 그 마사지기를 몇 번 갖다 대자, 신기하게도 탄력이 붙었다. 미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탐낼 만한 물건이었다. 요코 씨는 다낭에 있는 베트남 지인에게 이 사업을 알려주러 왔다며, 조만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오늘과 같은 미용기기 시연을 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기계는 하나에 한국돈으로 2~30만 원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계와 함께 쓰는 젤이나 로션, 수분 크림 등도 하나에 5~6만 원 가까이했으니, 싸구려 화장품을 쓰는 나 같은 한국 사람에게도 비싼 금액이었다. 베트남 사람에게 이 미용 기기는 거의 한 달 치 월급이 아닌가. 이걸 베트남 사람들한테 팔겠다고?


나는 잘 이해가 안 됐지만, 요코 씨 말대로 베트남은 신흥 부자가 늘고 있는 시점이었고, 90년대의 한국처럼 미친 듯이 성장하고 있는 나라였기에, 미리 사업 기반을 다져 놓기 위해 여기저기서 해외 사업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요코 씨도 이번에 자기 혼자 다낭에 온 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들어왔는데, 내일 저녁에 그들이 묵는 호텔에서 작은 파티를 할 예정이니 참가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 직접 일본 요리도 해준다는 말에 혹해, 거너를 꼬셔 데리고 갔다. 거너와 함께 살며 직접 살림을 해보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음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내게 무료 일본 가정식과 술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무조건 달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주방이 달린 호텔에서 요코 씨를 포함한 네 명 정도의 일본인이 요리를 하고 있었고, 그들의 지인으로 보이는 베트남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곧이어 갓 튀긴 일본식 튀김 요리와 덮밥이 식사로, 후식으로 케이크와 사케까지 나왔다. 식사가 끝난 후, 요리를 한 일본인 남자가 어제 요코 씨가 보여준 미용 기기를 꺼내 들고 시연을 시작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목구멍을 넘어 뇌까지 술과 밥으로 채운 나는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말을 제대로 안 듣고 있음을 인지한 것인지, 다음 날 요코 씨는 나만 따로 카페로 불러냈다.


어제는 즐거웠는지, 앞으로 언제까지 베트남에 있을 계획인지 등을 물어봤다. 그러면서 갑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화장품 사업이 얼마나 비전이 있고, 합리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회사인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결론은, 앞으로 사업차 베트남에 자주 올 건데, 나도 이 화장품 사업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이상한 느낌에 그제야 요코 씨가 말하는 회사를 자세히 살펴봤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다단계 회사라는 게 드러났다. 그녀가 판매하는 제품들은 일반 상점에서는 구매할 수 없었으며, 그 화장품 회사에 직접 가입해야 구매할 수 있는 구조였고, 내가 구매한 제품 금액의 일부가 나에게 이 제품을 알려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구조였다. 다단계라는 어휘 자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요즘에는 이런 구조로 마케팅을 하고 판매하는 회사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 그런 구조라고 해서 무조건 하위 가입 멤버들을 착취하는 게 아니라,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있다는 것도. 때문에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요코 씨의 회사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제는 요코 씨가 나에게 다단계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 게 너무나 의외라는 것이다.


베트남으로 영역을 넓히고 싶다면 베트남 사람 혹은 외국인이라도 베트남에 정착 비슷하게 한 사람한테 얘기를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여기서 이방인인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게 당황스러웠다. 베트남 사람들을 구워삶아 비싼 기계를 팔아먹을 만큼 베트남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 데다, 베트남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닌 내가 과연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애초에 나는 그 비싼 미용 기기를 살 돈도 없었다. 요코 씨는 사람을 골라도 한참 잘 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화도 나지 않았다. 욕심은 있어서 사람은 필요한데, 여기서 얼마나 찾은 사람이 없으면 한국사람인 나한테 그런 제안을 했을까. 오히려 요코 씨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던 요코 씨도 내가 그다지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여러 번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리에’에게도 권유했다고 하는데, 마리에도 나 같은 빈털터리 외국인인지라 요코 씨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다.


전 세계 다단계 회사가 안 들어간 곳이 거의 없다고는 하나, 내가 베트남에서 일본인에게 다단계를 권유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나라 간 국경이 사라진, 진정한 세계화가 된다는 게 이런 것은 아닐까.

베트남에 자주 오겠다던 요코 씨는 그 뒤로 다낭에서 본 적이 없다. 다낭이 아니라 베트남의 다른 지역에서 또 열심히 화장품을 알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맛있는 집밥을 대접해 준 사람인데 나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조심스레 그녀의 건투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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