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편집된 베트남 TV 출연

by 라봇

내가 집으로 벌레들이 쳐들어 와 곤란을 겪을 당시, 흔쾌히 본인 집 열쇠를 건네준 친구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마당발이었다. 베풀기 좋아하고 성격도 좋으니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건 당연했다. 그녀의 지인 중에서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급하게 출연자를 찾고 있다며 친구를 통해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 중 하나로, 베트남에 사는 외국인들을 데려다 미션을 주고 문제를 풀게 하는 야외 퀴즈쇼였다. 스튜디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특정 지역에 가서 그곳과 관련된 문제를 내기 때문에 매번 촬영 장소가 바뀌는데, 이번 촬영 장소는 ‘호이안’이었다. 유네스코로도 등재되어 있고 독특한 건축물로 가득한 장소라, 늘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장소 섭외부터 장비 등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는데, 외국인 출연자가 한 명 부족하다고 했다. 총 세 명의 외국인 출연자가 필요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두 명 밖에 구하지 못한 것이다. 촬영 날짜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멀리서 출연진을 구하기도 힘드니, 제작진은 근처에서 물어 물어 출연자를 구하고자 했고, 그 요청이 마당발 친구를 통해 나한테까지 오게 됐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살기만 여기 사는 거지, 베트남 TV 는 거의 안 보다시피 하기 때문에 무슨 프로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가만히 앉아 푸는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쨌든 미션을 받고 그걸 수행해야 하는 퀴즈쇼를 내 베트남어 실력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거절하려 했으나 거너의 설득에 넘어갔다. 언제 그런 TV쇼에 출연해 볼 기회가 있겠냐며,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하는 바람에 선뜻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촬영 날이 다가왔다. 촬영 장소는 관광지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곳으로 그나마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출연진은 외국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도 세 명 있었는데, 외국인 한 명과 현지인 한 명씩 짝을 이뤄 팀으로 진행하는 게임이었다. 남다른 외모의 남녀 MC가 카메라 앞에서 서서 오프닝을 했고, 나는 열심히 손을 흔들며 베트남어로 이름과 국적을 소개했다. 나와 함께 짝이 된 현지인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촬영 전 만나서 얘기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인사도 제대로 주고받지 못 한 채 바로 미션 수행에 들어갔다.


첫 번째 미션은 특정 장소를 찾아가는 거였는데, 알쏭달쏭하게 쓰인 문장을 해석해 정답인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쓰여 있는 문장 자체도 해석이 잘 안 되는데, 그걸 읽고 추측을 해야 하니 나는 거기서 아무 도움 안 되는 까막눈이나 마찬가지였다. 함께 팀이 된 파트너와도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영어 반, 베트남어 반을 섞어가며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션 장소에 도착했지만 꼴찌를 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MC들이 내는 퀴즈를 듣고 손을 들고 정답을 말하는 미션이었다. 베트남 문화와 호이안 역사 지식이 좀 있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문제 난이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나는 거의 병풍처럼 서서 그냥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두 명의 외국인들도 나와 비슷한 상황인가 싶었지만, 그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도대체 베트남살이 몇 년 차인건지, 현지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베트남어를 구사하며 재미있게 방송에 녹아든 느낌이었다. 팀워크가 필요한 미션이었는데 졸지에 까막눈에 귀머거리인 외국인과 팀이 된 내 파트너는 말은 안 했어도 시종일관 답답한 눈치였다.


다행히도 마지막 미션은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몸으로 하는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손을 쓰지 않고 밀가루를 가득 묻힌 음식을 입으로 물어 옮기는 일로, 한국에서도 학교 다닐 때 해본 적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말 한마디 안 해도 된다는 게 나에게는 최고의 미션이었다.


그렇게 얼굴에 허연 밀가루를 잔뜩 발라가며 마지막에 열연을 펼쳤지만, 결국 우리 팀이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하며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내 파트너는 결과가 실망스러웠는지, 촬영이 끝나자마자 인사도 없이 바로 가버렸다. 나 역시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다 생각했지만 이미 그걸 파악하기엔 늦어도 너무 늦은 상태였으니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있겠냐며 남은 건 편집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 내가 찍은 촬영본이 드디어 방영되는 날, 나는 핸드폰으로 동영상 찍을 각오로 삼각대까지 TV앞에 설치해 놓고 기다렸다. 드디어 퀴즈쇼가 시작되고, 화면 가득히 내 얼굴과 함께 나를 소개하는 자막이 등장했다. 남의 나라 TV에서 내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감격스러워서 거너와 함께 손을 마주 잡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첫 번째 미션과 두 번째 미션에서 다른 팀이 정답을 찾는 모습은 아주 자세하게 나왔는데, 우리 팀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긴 했지만 파트너가 문제를 해독하는 장면과 뒤늦게 우리가 미션 장소에 도착한 장면이 끝이었다. 몸으로 하는 미션에서 드디어 내가 나오나 했는데, 밀가루 묻은 얼굴과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2초 정도 나오고 그쳤다. 마지막에는 출연진 전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우승팀의 얼굴만 비쳤으니, 나는 결국 처음에 자기소개 외에 거의 모든 장면에서 편집이 된 것이었다.


애초에 15분 이내로 끝나는 짧은 코너 같은 거라, 촬영 시간에 비해 편집이 많이 필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편집 대상의 90%가 내가 될 줄이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어도, 막상 다 잘린 완성본을 보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거너는 남의 속도 모르고, 처음에 인사만 하고 너는 어디 가서 자다 왔냐며 놀려댔다. 동영상으로 찍어 SNS에 나의 TV 출연을 자랑하고 싶었던 계획은, 캡처한 사진 한 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도 가끔 베트남 TV에 나온 걸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한다. 자랑 대상은 방영본을 찾기 힘든 한국 친구들뿐이지만 말이다. 부디 그들이 내 과거 영상을 찾아내질 않길 바랄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일 똑같은 걸 먹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