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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Sep 05. 2023

일주일만에 준비한 국제 결혼

베트남을 떠나는 날, 거너와 나는 공항에서 오래도록 포옹을 나눴다. 그는 미국으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한동안 볼 수 없을 터였다. 나는 한국에서 비자를 기다리며 결혼식 준비를 해야 했고, 비자 초정자인 거너는 자기가 미국에 직장이 있으면 비자받는 게 더 수월할 거라며 취직을 위해 먼저 미국으로 향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결혼식 장과 날짜, 드레스를 한 번에 정했다. 아버지 덕에 군인공제회에서 운영하는 결혼식장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따로 식장을 알아보지 않았다. 드레스나 액세서리도 전부 결혼식장에 딸려 있는 샵에서 골랐기 때문에 굳이 드레스를 고르러 여기저기 다닐 필요가 없었다. 스튜디오 사진도 찍지 않았으며 청첩장도 안 만들었다. 애초에 결혼식 자체에 큰 미련이 없었고, 부모님을 위해서 치르는 행사였기에 최대한 필요한 것만 뽑아 간단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정도 정했으면 더 이상 식에 관해 고민할 게 없을 줄 알고 마음 편이 있었지만,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국제결혼이라는 것을 말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거너는, 베트남에서 IT 회사에 다녔던 경력을 살려 집에서 1시간 거리의 회사에 취직을 했다. 생각보다 취직이 빨리된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미국 회사는 한국 회사와 시스템이 완전히 달랐다. 보통 결혼을 하면 신혼여행 명분으로 약 일주일 정도 휴가를 주는 한국 회사와 달리, 미국 회사에서 직원의 결혼식은 그의 사적인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식을 위해 한국에 방문해야 한다고 하면, 결혼은 당신의 극히 개인적인 일인데 왜 회사가 당신을 위해 휴가를 주어야 하냐는 게 미국 회사의 입장이었다. 거너가 개인 휴가를 사용해서 한국을 오려고 해도, 입사 1년 차는 되어야 일주일정도 휴가를 쓸 수 있어, 무급 휴가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의 안타까운 상황을 들은 상사는, 본인의 휴가 일수를 거너에게 빌려주었다. 나중에 거너가 근무 일수가 쌓여 휴가를 쓸 수 있게 되면 그걸 상사한테 넘겨서 갚으면 될 일이었다. 상사의 배려로 간신히 일주일의 휴가를 얻었지만, 그 말인즉슨 일주일 안에 한국에서 상견례, 신랑 예복과 어머니 한복 맞춤, 결혼식, 관광 등을 전부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게다가 거너의 부모 형제들은 아시아 국가 방문 자체가 처음이었다. 테네시 주의 아주 작은 시골에 사는 그들에게 한국의 모든 것은 낯설고 힘들 것임을 알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일주일 안에 모든 것을 문제없이 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을 되돌아보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약간의 후유증이 몰려 올 만큼 정말 스트레스 넘치는 일주일이었다 자부한다. 


거너의 가족들이 한국에 온 다음 날, 충무로에 있는 한정식 집에서 상견례를 했다. 거너의 아버지는 시차 적응이 안 돼 힘드셨는지 식사 도중 음식을 전부 게워내는 불상사가 있었고, 긴장했던 탓인지 숙소로 돌아가서는 내가 음식들을 게워내며 차례차례 신고식을 치렀다. 그 와중에 나는 사회, 축가, 통역 구하기, 식에 쓰일 음악찾기, 외국에서 오는 하객 챙기기 등 식에 필요한 전반적인 일까지 도맡아 하느라 거의 분신술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거너가 맞는 예복이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장거리 운전을 하며 회사 생활을 하는 거너는, 주로 맥도날드로 배를 채웠고, 그 때문에 인생 최대 몸무게로 한국을 찾았다. 하필이면 결혼식 때 살을 왕창 찌워 오다니 짜증이 솟구쳤지만, 이미 쪄버린 살이 잔소리한다고 당장 빠질 것도 아니었고 맞는 옷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당장 주말이 결혼식인데 신랑이 평상복 차림으로 입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식장 근처에 웨딩 거리를 뒤져 겨우 맞는 예복을 찾아냈다. 사실 맞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봐도 끼는 옷이었지만 몸이 들어가는 최선의 예복이 그것이었다. 거너는 울상을 지었다. 옛날 TV쇼 진행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복을 보러 다니면서 전부 자기 보고 살쪘다고 하니 우울감이 극에 달한다고 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살쪄 오랬냐고 누구보다 바가지를 긁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지금 예복도 너무 잘 어울린다고 영혼 없는 칭찬으로 달랬다. 


옷이 안 맞는 건 시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들끼리는 한복을 입고 입장하기로 해서, 오자마자 한복집에서 옷을 맞췄는데 한복집의 실수로 옷을 작게 만들어버렸다. 결혼식이 이틀 남은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당일 날 입을 수 있게 다시 만들어달라고 으름장을 놓으니, 식 바로 전날 밤에야 맞는 한복을 입어볼 수 있었다. 그 이상 뭐가 더 잘 못 되었다 해도 더 이상 수정할 체력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레임보다는 이미 지친 마음으로 될 대로 되라는 게 그날 결혼식 장으로 향하는 내 마음가짐이었다. 이제는 정말 식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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