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손님은 신랑
혼자 하는 결혼은 아니지만 식은 혼자 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이 결혼식에서 거너가 관여하는 일은 ‘신랑’ 역할 밖에 없었다. 외국에서 오는 친구들을 위해 테이블 자리 짜기, 통역, 사회, 축가, 피로연 등 식에 관한 모든 걸 다 내가 결정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지 일일이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에는 동생을 활용했는데, 살면서 유일하게 동생의 쓸모를 느낀 날이었다.
하는 일 없는 우리 ‘신랑’을 챙기는 것도 내가 할 일이었다. 보통의 신랑들은 식장 앞에 서서 하객들을 맞이하지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하객들을 거너가 맞이하는 것도 못 할 일이기에, 그를 내가 있는 신부 대기실로 불러 친구들이 오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었다.
우리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했다. 대신 양가 아버님들이 차례로 단상에 서서 우리에게 쓴 편지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각자 작성한 혼인 서약서를 읽었다. 모든 부분을 통역이 함께 진행했기 때문에, 특별한 것 없는 결혼식인데도 다른 결혼식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대신 식이 종료된 후 친구들과의 단체 사진은 생략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객으로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가장 마지막에 진행되는 친구들 단체사진까지 기다리는 게 지루했고, 또 어색하게 서서 사진사에 말에 따라 포즈를 취하는 게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보고 바로 뷔페로 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고, 가족들과만 사진을 찍었다. 부캐 던지기도 하지 않았다.
부캐도 생략할 정도인데 내가 폐백을 했을 리가 없다. 폐백은 안 했지만 본식 후에 나만 한복으로 갈아입고, 식당을 걸어 다니며 거너와 함께 인사를 다녔다. 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요동을 쳤다. 다행히 식장을 떠나기 전 5분 정도 시간이 남아,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거의 쑤셔 넣다시피 입에 들이붓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내 친구들과의 2차 피로연장으로 향할 차례였다.
택시를 불러 거너의 가족들이 숙소로 돌아가는 걸 돕고, 나와 거너는 미리 대관해 둔 술집으로 향했다. 물론 부모님도 도와주시기는 했지만 거의 신랑을 ‘초대’한 격이었던 이 결혼식을 무사히 끝낸 것만으로도 굉장히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결혼식을 위해 상사에게 휴가를 빌렸던 과정을 거쳐, 나와 함께 본인 가족들을 챙기느라 고생했던 거너 또한 마침내 끝났다는 해방감이 있었는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며 왕창 마셔댔다. 다음 날 일찍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도 말이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자,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할 수 없어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돌리고 피로연을 파했다.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거너는 등을 돌리고 시끄럽게 코를 골아댔다. 내 비자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내일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면 한 동안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현실은 술에 취해 서로는 안중에도 없는 마지막 밤이 되었다.
비행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에 그를 깨워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짧은 일정 동안 정신없이 외국 결혼식 일정에 따르느라 고생한 그의 가족들 모두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거너와는 애틋한 포옹을 나누고 싶었지만 숙취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곧 신물을 올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잘 가라고 등만 토닥이고 말았다.
무사히 결혼식의 마지막 ‘손님’인 신랑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드디어 나의 결혼식이 마무리가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거너와 나의 특별한 날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걸 다시 한 번 되풀이 하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 부디 이 힘든 결혼식을 되풀이할 일 없이, 이것이 이 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