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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Sep 12. 2023

면접 날 아침, 남편의 신상을 공부했다

느려터진 미국 이민국 일처리로, 영원히 안 올 것 같은 내 비자 면접날짜가 잡혔다. 아침 일찍 광화문 쪽에 있는 대사관으로 가야 했기에, 시간을 넉넉히 맞추기 위해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고 전날 미리 가서 숙박을 했다. 


대사관에 가기 전, 남편과 통화를 했는데 면접 걱정을 했다. 대사관 비자 면접이 은근히 까다롭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 비자는 미국 비자를 노리고 가짜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를 가려내기 위한 질문을 한다고 했다. 몇 개의 질문으로 이 결혼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려낸다는 것도 웃기지만, 내 쪽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증명해내야 하니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우리는 결혼 전 3년 반을 연애했고, 그 중 함께 생활한 시간도 짧지 않으니 웬만한 질문에 답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거너의 생각은 달랐다. 인터넷으로 대사관 비자 질문에 관한 내용을 찾아봤고, 그 질문 목록들은 생각보다 사무적인 질문들이 많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비자 초청인인 배우자의 직장 이름, 직급, 사는 동네, 졸업한 학교 같은 기본적인 신상 정보에 대해 물어본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가 말한 비자 질문 후보지 중 내가 답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동네야 전에 가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 취직한 회사가 어디인지, 무슨 직급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개발자로 취직을 했다는 것은 알았어도, 일에 관해서는 서로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기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최근 취직한 회사가 어디인지가 우리 결혼 생활에 크게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사관 면접에서 이런 질문이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익명의 경험자들의 말에 따라, 급히 그가 졸업한 학교명과 직장명, 직급 등을 외우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냥 이력서를 받아 들고 통째로 외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외우면서도, 과연 이런 정보들이 비자 면접에 필요할까 반신반의하며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비자 면접은 내가 의심했던 그대로였다. 심지어 면접관은 내게 어떤 언어가 편한 지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영어로 말을 시작했으며, 그가 한 질문은 정확히 내가 당일 아침에 외운 내용이었다. 거너의 대학 전공, 그가 일하는 회사는 무슨 회사인지와 그 안에서 맡은 역할,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관해 물어봤다. 내가 그의 아내 자격으로 미국에 가려 하는 건 알고 있는 것인지 의심되는 질문들이었다. 흡사 내가 거너의 고용주로, 앞으로 내가 고용할 사람의 이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자를 받기 위한 위장 결혼이라면 이런 신상 정보에 대해 더 명확히 알고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로 위장 결혼과 진짜 연애결혼을 구별해내려 한다는 게 도통 이해가 안 됐지만, 그들의 절차가 그러하니 비자가 필요한 나로서는 군말 않고 따랐다. 또 한편으로는 당일 아침에 급하게 외운 정보들이 면접에 너무나 도움이 되어 안심이 됐다. 하마터면 그 어떤 질문에 대답도 못 한 채 3년 반의 연애 전체를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뻔했다. 


대화를 마치고 무사히 면접을 끝냈다는 자신감이 차 올랐는데, 결과는 맙소사... 비자 비승인이었다. 서류 하나가 영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사관 직원이 이메일로 보내준 자료 그대로 준비한 것인데 이제 와서 대사관은 이 서류가 아니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지만, 거기서 따지고 들 힘 따위 내게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반려된 서류를 들고 대사관을 나왔다. 그리고 새로 서류를 보안해 다시 미국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내가 향한 곳은 서울 어느 구석에 있는 허름한 물류 컨테이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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