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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Sep 15. 2023

컨테이너 박스에 배팅된 내 운명

대사관에서 서류 문제로 비자 승인에서 떨어진 후로는 다시 면접 날짜를 잡을 수 없었다. 그쪽에서는 여권과 필요 서류를 동봉해서 우편으로 보내라고만 했다. 무려 여권과 개인 정보가 가득 담긴 서류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게 무척이나 염려되고 못 미더웠지만 대사관에서 그렇게 하라고만 하니 따라야 했다. 


대사관에 우편물을 보낼 때는 지정되어 있는 택배 회사 하나만 이용할 수 있었는데, 평소에 많이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 이름이었기에 낯설었다. 그 택배 회사로 내 서류를 직접 들고 찾아갔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고, 지하철을 타고 갔지만 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어 우산을 들고 약 20분가량을 걸어갔다. 헌데 지도 앱에서 가리키고 있는 곳은 어떤 물류 창고였다. 밖에도 배송 차들이 세워져 있어 누가 봐도 물류 창고로 이용되는 곳이지 택배 회사로 보이는 곳은 없었으며 흔한 간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한참 그 주변을 배회하니, 밖에서 담배를 태우던 남자분이 다가와 무슨 일로 여기 왔느냐 물었다. 택배 회사를 찾고 있다고 하자, 내 뒤에 있는 큰 창고 하나를 가리켰다. 창고 깊이 들어가니 고시원 방 두 개 정도 합친 크기에 기다란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다. 컨테이너 외벽에 붙어 있는 oo택배라는 작은 표지판 하나가 내가 맞게 찾아온 것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대사관에서 지정한 택배 회사가, 남의 물류 창고 안 허름한 컨테이너 안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정말 이곳이 맞는지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oo택배라고 쓰여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니 그 안은 더욱 놀라웠다. 허리케인이라도 한 번 휩쓸고 갔는지, 내부는 정리되지 않은 서류와 짐들도 어지러웠고, 그 안에 아무렇지 않게 파묻힌 어떤 여자분이 있었다.  


대사관 서류 배송 일로 왔다고 하자, 대수롭지 않게 큼직한 우편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곳에 여권과 모든 서류를 넣고 주소를 적으라는 것이다. 익숙한 듯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들고, 그래도 맞게는 왔구나 하는 약간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여권과 서류를 넣고 봉투 겉면에 우리 집 주소와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봉투에 적혀 있는 ‘받는 사람란’에는 ‘중국 대사관’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르는 중국어가 적혀 있었다. 그 직원이 굉장히 자신감 있게 건네주었던 터라, 그냥 이거는 서류를 담기 위한 봉투이고, 나중에 그녀가 새로 봉투를 바꿔 담아 보내주는 것인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냥 넘어갈까 싶었지만 그러기에 여기 담긴 서류는 너무 중요한 정보였으며, 그간 기다린 내 시간이 담겨 있었다. 


“이 봉투에 담아 드리면 미국 대사관으로 전달이 되는 거 맞죠?”

내 질문을 들은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고 타자를 치던 손이 멈췄다. 


“미국 대사관에 보내시는 거예요?”

“예”

그러자 그녀는 새로운 봉투를 건네줬다. 


“거기 넣으시면 중국 대사관으로 전달이 돼요. 이 봉투에 새로 넣으세요.”


순간 화가 솟구쳤다. 애초에 어느 대사관으로 보낼 서류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중국 대사관 봉투를 준 건 당신이지 않는가. 한 군데 이상의 대사관 배송 일을 맡고 있다면 적어도 배송지는 물어봐야 하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때문인지 직원은 내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중국 대사관 봉투를 건네주었다. 한 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언제나 비자 앞에서 나는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들의 잘못이 생겨도 나는 항의 한 번 할 수 없었다. 비자 진행 과정 중 누구 한 명의 눈 밖에 나면 그들이 내 서류를 치워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대사관에 전달이 될지, 전달이 되어도 최종 승인이 몇 주가 걸릴지 몇 년이 걸릴 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 받은 봉투에 서류를 넣고 나오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마디는 그저 ‘잘 부탁드립니다’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매우 불쾌한 찝찝함이 함께 따라왔다. 과연 내 여권 서류가 제대로 대사관에 전달이 될 수 있을지 신뢰성이 1%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질문으로 중국으로 갈 것을 되돌려놓기는 했지만 그 어지러운 사무실 책상에서 내 서류 봉투가 살아남아 무사히 미국 대사관까지 당도할지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 날 밤에 주문하면 새벽에 배송이 오는 나라에서 하는 참 아이러니한 걱정이었다. 


그리고 2주를 더 기다렸다. 다행히 택배사에서는 배송을 완료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하지만 대사관에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도대체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결국 내가 다시 대사관에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귀찮게 하자, ‘거절’로 뜨던 비자 상태가 드디어 ‘승인’으로 바뀌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받은 따끈따끈한 비자였다. 이제 진짜 미국으로 갈 준비가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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