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승인을 받고, 바로 2주 후에 떠나는 비행기로 예약했다. 정해진 기한 없이 이민으로 가는 거다 보니 언제 볼지 모를 가족들이었지만, 옛날부터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우리 가족은 그 누구 하나 흐느끼고 슬퍼하는 사람 없이,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살아남으라는 말을 남겼다.
거너가 혼자 살고 있는 곳은 테네시주의 윈체스터라는 작디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미국으로 들어가 무조건 경유를 한 번 해야 하고, 공항에서도 집까지 차로 90분은 떨어져 있는 곳이다. 아무리 경유 시간이 짧아도 거의 하루는 잡고 가야 하는 참 멀고 먼 곳이었다.
드디어 거너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이곳으로 오는 건 사실 달갑지 않았다. 여기서 자란 거너 조차 이 마을을 굉장히 싫어할 정도로 지루함과 심심함을 넘어 우울하기까지 한 동네이기 때문이다. 비자가 나오기 전, 관광 비자로 와서 잠시 거너와 두 달 정도 생활한 적이 있는데,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갈 곳도, 할 것도 없는 그저 식료품 마트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거너도 내가 오기 전까지만 이곳에서 지낼 생각이었고, 내가 완전히 들어온 이상 함께 더 나은 동네를 찾아 이사 가고 싶어 했다. 그래도 아직 영주권 카드를 정식으로 받은 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배송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는 게 비자 상황에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으로 들어가자마자 거너가 한 것은 차 구매였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거의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진짜 이 정도로 대중교통이 없을 줄 몰랐다. 어느 정도 알려진 큰 대도시 몇 군데에만 대중교통이 있었고, 그 마저도 치안 문제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나라이기에, 차가 없으면 집 밖을 나서는 것조차 어려웠다. 편의성 때문이 아니라 24시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면 무조건 차가 필수였기에 내 돈과 거너 돈을 합쳐 중고차 한 대를 구매했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이 동네에서는, 차가 있으나 없으나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차로 30분 거리 이내에 자리 잡고 시간 보낼 카페 하나가 없다고 하면 어떤 동네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러니 나의 하루는 너무 단순하다 못해 시시했다.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일도 집에서 했으며, 문화 센터나 운동 센터도 없었다. 영화관도 차로 30분은 가야 했다.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사람 만날 기회 자체도 없었다. 주말마저 집에만 박혀 있기 뭐 해 거너와 함께 밖을 나갔지만, 괜찮은 식당을 가려해도, 볼거리나 할 거리를 찾으려면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은 운전이 필요했다. 시골 생활이라는 게 전원생활과 비슷할 것이라 착각했던 나는, 미국의 시골 생활은 ‘고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안 그래도 타지에 와서 말도 잘 안 통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 천지인데, 그 와중에 사람 구경이 힘든 시골에 처박혀 있으니 딱히 즐거운 일도, 새로울 것도, 경험할 것들도 없었다. 사람이 그립기는 했지만 오히려 집 근처에 누군가 어슬렁거리면 반갑다기보다 경계를 하게 되었다. 동네가 위험한 동네는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안심할 정도로 치안이 되게 좋아 보이는 동네도 아니어서, 낮에도 블라인드를 반 정도는 항상 가려두었다. 베트남에서는 처음에 거대 바퀴들 때문에 스스로를 방에 가두었는데, 미국에서는 그냥 여기 사는 것 자체가 갇혀 사는 것과 비슷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혼으로 외국으로 이사 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관계가 배우자로 한정되어 있고,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식으로, 언니로, 회사 직원으로, 친구로, 모임 구성원으로 등 다양한 위치에서의 나를 경험하기보다, 한정된 인간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나를 보는 건 생각보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온갖 모임에 참여할 수 있고 다양한 인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자국의 도시 생활과는 정반대인 타국의 시골 생활은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