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봇 Sep 22. 2023

양심값으로 치른 90만 원

운전을 잘해서 자주 더 멀리 갈 수 있게 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일단 한국에서 받아온 국제 면허증을 활용해 시부모님과 운전 연수를 시작했다. 면허는 있어도 한국에서 운전할 일이 없으니 거의 십여 년 만에 운전대를 잡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트나 근처 공원까지만 운전을 하다가, 30분 거리, 한 시간 거리 등 운전 거리를 늘렸다. 워낙 시골이라 도로에 차가 많지 않으니 운전이 쉽게 느껴지다가도, 옆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내 차를 들썩이게 만드는 대형 트럭들이 레이싱 속도로 도로를 누비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양손 가득 배인 식은땀으로 운전대가 축축해졌다. 


제일 놀란 것은 비보호 구역과 신호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비보호 구역이 많다는 게 운전 능숙자에게 편한 일일 수도 있으나, 나 같은 미숙자에게는 늘 눈치를 보고 재빨리 액셀을 밟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었기에 스트레스가 두 배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차 스트레스는 적었다. 한국에서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차 공간 때문에 간신히 차를 대도 비좁은 문틈을 통해 게걸음으로 차에서 내릴 때가 많았는데, 남는 건 땅덩어리인 미국에서 주차 공간만큼은 유일하게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방심했을 때가 가장 큰 문제인 건지, 결국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집이 있는 윈체스터에서 30분 정도 운전을 하고 가면, 유명한 미국 위스키인 ‘잭 다니엘’ 양조장이 있다. 북미를 여행 중인 친구가 조만간 우리 집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여기에 데려가기 위해 미리 와보는 운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 운전 실력이 걱정된 시아빠가 동행을 했고, 문제없이 양조장에 주차를 한 후 핫도그로 점심을 함께 했다.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켰다. 후진을 한 후 차를 돌리기 위해 앞으로 전진을 했는데, 조수적에 앉아있던 시아버지는 “어어!!”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반응도 늦었던 나는 ‘쿵’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고 나서야 내가 주차되어 있는 어떤 차를 뒤에서 박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몰던 차는 앞부분이 기다란 중형차였는데 그 차도, 운전도 익숙하지 않던 나는 내 차의 보닛이 얼마나 긴지 가늠을 못 하고 제 때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다. 다행히 차를 빼내는 중이었기에 속도가 높지 않았고 주차된 차였기에 사람이 다치는 사고는 없었지만 처음으로 남의 차를 박아버린 나는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가 물었다. 큰 충돌 사고는 아니지만 내려서 차 주인을 찾고 조치를 취하고 싶은지, 아니면 그냥 집으로 향하고 싶은지 말이다. 한국처럼 거리와 도로에 CCTV가 많지 않은 미국 시골에서는 이 정도의 사고는 그냥 무시하고 가는 미국인들도 많다고 했다. 게다가 의외로 차에 블랙박스를 달고 다니지 않는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차에서 내려 확인해 보니 구겨진 부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얀 흠집이 일어난 것이 누가 봐도 누가 뒤에서 부딪힌 흔적이 역력했다. 눈에 띄는 흠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아버지가 옆에 있기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있는 지도 몰랐던 양심이 발끝에서 올라오며 나는 그냥 가는 대신 차 주인을 찾겠다고 했다.


근처 가게를 돌아다니며 차 주인을 찾다가 결국 포스트잇을 남겨두고 가려는 찰나, 중년의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내 차 앞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물었다. 그녀는 근처 상점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우연히 밖에 나왔다가 우리를 발견한 거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차를 박아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보상을 해드리고 싶은데 견적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메일 주소를 건넸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래도 맞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과 그 정도 흠집에 괜히 차 주인까지 찾아 나서서 일을 키운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 차는 굉장히 비싼 차에 뽑은 지 얼마 안 된 새 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나 며칠 뒤 이메일로 받아본 보상 요금은 90만 원이었다.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차량 도구로 살짝 문지르면 지워질 것 같은 흠집이었는 데다가, 차 주인까지 찾아 나서며 어떻게든 사과하려 했던 내 태도가 약간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것은 그냥 내 바람일 뿐이었다. 보험 처리를 했다가는 안 그래도 비싼 보험료가 더 오를 테니 그냥 현금으로 생돈 90만 원을 송금했다. 속은 매우 쓰렸지만 그래도 인명사고 없이, 더 큰 돈 나가지 않고 이 정도로 신고식 치른 것만으로 다행이라며 정신 승리를 하려고 애썼다. 그게 계기가 되어 감사하게도 그 후로는 큰 사고 없이 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 부디 그 90만 원이 앞으로의 모든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이었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이민 간 그 우울한 미국 동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