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같이 베트남어 수업을 듣다 알게 된 친구가 북미 여행을 하며 우리 집에 들르겠다고 연락이 왔다. 친구가 온다는 건 너무 기뻤지만, 아직 나도 익숙하지 않은 이 동네에, 또 그걸 떠나서 정말 할 것 없는 이 시골바닥에 온다니, 도대체 뭘 하면서 놀아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친구는 위치를 알려주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집 앞까지 찾아간다고 했다. 내가 있는 곳은 택시도 지하철도 기차도 아무것도 없는 미국의 허허벌판이라는 것을 알리 없던 것이다. 그녀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면 직접 차를 렌트해서 운전해서 오거나, 내가 차로 마중 나가는 이 두 가지 방법 외에는 없었다. 오로지 운전만이 이 긴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차는커녕 면허도 없는 친구가 직접 운전해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 없었고, 나 역시 동네나 끄적끄적 움직이는 운전 실력으로 고속도로를 90분이나 달릴 수 없었다. 결국 나를 위해 나서준 사람은 시아빠였다. 은퇴하고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으신 분이라 운전기사를 자처하셨다. 친구를 픽업해 간단히 밥을 먹고 집으로 들어오니, 오후 2시가 약간 넘었다. 거너가 오면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자며 같이 근처 마트라도 데리고 가려고 차 키를 찾았다. 그래도 친구가 오기 전 매일 같이 운전 연습을 했기에, 드디어 운전 실력을 자랑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이게 웬걸. 차 키가 보이지 않았다.
그 전날 거너가 내 차를 운전했던 걸 기억하고 그에게 전화해 물었으나, 늘 물건을 아무 데나 두고 사는 그는 어디다 뒀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남편이다. 이 동네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차가 있어도 집에 갇혀버린 샘이다. 우리 집에 오자마자 같이 갇혀버린 친구에게 미안했으나 도리가 없어 거너가 돌아와 차 키를 찾을 때까지 조용히 집에만 박혀 있었다.
다음 날 드디어 친구에게 내 운전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왔다. 90만 원짜리 주차 연습을 했던 ‘잭 다니엘’ 위스키 양조장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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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산길이 무서워 시속 40으로 운전했더니 뒤에 있던 차들이 추월하고 난리가 났다. 게다가 가는 길에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에 차를 세웠는데, 맙소사, 미국에서는 거의 다 셀프 주유를 하는데, 나는 한국에서도 주유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영상 통화로 거너에게 전화를 걸어 주유기 화면을 보여주며 겨우겨우 셀프 주유를 했다.
힘들게 찾아간 양조장 투어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지만, 미국 양조장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던 것이다. 양조장 투어의 마지막은 잭다니엘에서 판매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위스키를 맛보는 일이었다. 약 다섯 종류의 샘플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달짝지근하고 맛있어 전부 빠뜨리지 않고 맛을 봤다. 그리고 투어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친구는 위스키 마시고 운전해도 괜찮겠냐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제야 지금 여기서 운전할 사람이 나 밖에 없는데 술을 마셨다는 걸 인지했다. 투어가 즐거워 아무 생각 없이 샘플 위스키를 마셨는데,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는 내가 운전 안 하면 달리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중교통이 전무한 이곳에서 무엇을 타고 집으로 갈 것인가. 그렇다고 대리기사가 있는 것도 아닌 데 말이다. 나라고 목숨이 걸린 운전을 술 마신 채 하고 싶겠냐만, 딱히 시간을 더 보낼 곳도 없었고, 조금 더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라 어둠 속에서 운전하는 건 더 무서웠다. 별 수 없이 시동을 걸었다.
한국이었으면 정말 난리 날 상황인데, 미국에서는 눈에 띄게 위험해 보일 정도로 만취 상태가 아니면 이 정도는 용인해 주는 듯했다. 물론 차가 휘청댈 정도라면 경찰이 다가오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동네 경찰은 주로 과속 운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투어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모두, 양조장 휴게실에 놓여 있는 레몬물로 입가심을 하더니 각자의 차를 몰고 하나 둘 떠났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술을 마신 채 약 30분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운전에 방해가 될 까봐 별 말 하지 않았지만, 차를 타는 내내 머리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놓지 않았다.
내 운전 실력을 우려하는 친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열심히 연습을 했건만, 본의 아니게 내가 보여준 건 위스키를 다섯 종류나 마신 후 하는 음주운전이었다. 그래도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술을 마셔도 직접 운전할 수밖에 없는 이곳의 상황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던 친구의 얼굴이 투어보다도 인상적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