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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Oct 08. 2023

해결의 열쇠

외국에 살다 보면 한국이 얼마나 빠른 일처리와 편리함을 추구하는 나라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여행이라면 모를까 본격적으로 거주를 하려고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사소한 모든 것들에 불편함을 느낀다. 오늘은 그 사소한 것 중 하나인 열쇠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나는 열쇠의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열쇠’라는 단어 자체를 써 본 지 너무 오래였다. 그것은 내게 마치 오래전 선조들이 썼다던 유물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모든 집들이 현관문에 전자식 키패드를 달고, 자동차 또한 시동 방식이 버튼식으로 바뀌면서 실물 열쇠를 본 지 20년은 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다시 열쇠를 사용했을 때도 신기했는데, 미국도 베트남과 다를 바 없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다.


그냥 나오면 알아서 잠기는 현관문을 쓰며 살았다보니, 나올 때도 들어갈 때도 열쇠로 꼼꼼히 잠가야 한다는 것도, 어딜 가든 잃어버리기 쉬운 그 작은 물건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것도, 귀찮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식기세척기에 건조기까지 다른 건 전부 편리한 가전제품을 쓰면서, 왜 중요한 집 보안 장치만큼은 그 옛날 버전을 고수하고 있는 건지 신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집 열쇠 없이 현관문을 잠그고 나왔다가 집에 못 들어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하나밖에 없는 열쇠를 잃어버려 열쇠 수리공도 몇 번 불렀다. 나처럼 덜렁거리는 성격의 사람들은 열쇠와 함께 하는 삶이 꽤나 피곤했다.


대체 왜 그놈의 열쇠를 포기하지 못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는데,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먼저 사는 형태가 다르다는 걸 들 수 있다. 아파트에 많이 사는 한국 집 특성상 키패드가 야외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적다. 공동 현관문을 통해 들어가 건물 안에서 키패드를 누르기 때문에, 비나 눈 같은 날씨에 영향을 받을 일이 거의 없는데 반해, 주택이 많은 미국 집들은 키패드가 야외에 노출되어 있는 일이 많다. 홍수, 허리케인, 지진 등 자연재해도 대륙급인 미국에서 전자 제품인 키패드가 눈, 비를 자주 맞으면 고장률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다.


도둑이 걱정 안 되냐 할 수 있지만, 어차피 도둑놈들은 현관문에 열쇠 구멍이 달려있든, 키패드가 달려있든 상관없이 들어온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각 집마다 총을 구비하고 있어, 생각보다 강도 드는 일이 흔치 않다. 귀중품이 많은 부잣집들은 아예 허가받지 않은 차로 진입로에 들어서지도 못하도록 보안을 까다롭게 해놨기 때문에 키패드가 열쇠보다 더 보안이 된다 라는 생각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렇게 열쇠 사용에 불평불만이던 내가 어느 순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걸 발견했는데, 이유는 차 때문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차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곳이 미국이기에, 집 밖을 나설 때는 무조건 차 키를 들고나갈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열쇠고리를 들고나가야 되니, 거기에 집 열쇠 하나 더 걸어두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열쇠 없이 문을 잠갔을 때를 대비해, 예비 열쇠를 하나 더 만들어 집 바깥 주변에 숨겨 놨더니 집에 못 들어가는 일도 없어졌다. 나도 모르는 새 열쇠와 함께 하는 생활이 적응이 되어버린 것이다. 키패드로 바꾸려고 제품 종류 별로 가격도 알아봤는데 어느새 당연한 듯 열쇠를  잘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빠르고 편리한 게 최고라고 생각하던 나는 키패드가 열쇠보다 훨씬 우월한, ‘문명’에 가까운 무엇이란 생각에 열쇠만 고집하는 이곳이 이해가 안 됐지만, 그들에게는 굳이 현관문 여는 방식 따위 바꿀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열쇠 덕에 새로운 쇼핑 목록이 생겼는데 바로 열쇠고리다. 전에는 여행지 기념품 가게에 가면, 요즘 세상에 대체 누가 열쇠고리를 산다고 이렇게 많이 파나 했는데, 알고 보니 나 같은 사람들이 사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관심 없던 열쇠고리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내가 열쇠를 쓰는 입장이 되다 보니, 그간 관심 없던 예쁘고 독특한 열쇠고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개는 싫다던 아버지가 막상 반려견을 데리고 오니, 개 옷을 열심히 고르고 있는 모양이랄까. 나의 사소했던 불편 중 하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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